# 창작시 - 최정/부평동 시절 시(1999-2009)

방들에 대한 맹세

최정 / 모모 2010. 12. 5. 13:33

 

방들에 대한 맹세


 


                                             최 정


 


 


 


 빨간 펜으로 눌러 쓴 ‘인내’라는 두 글자가 선명히 책상 앞에 붙어있던 고1 하숙방은 도심에 물드는 노을이 아름다웠다


 최루가스 묻은 마르크스의 ‘공산당 선언’을 숨겨 놓았던 대학 1학년, 따뜻한 방에서 생리통이 불규칙적으로 지나갔다


 지붕이 낮은 자취방은 벗들로 넘쳐흘렀으나 장마철 곰팡이 핀 천장이 무너질 듯 위태로웠다 제 때 돌아오지 못하는 외박 같은 시편들이 내게로 왔다


 퍼붓는 햇살에 잠을 깨던 창 넓은 방은 나의 첫사랑이었다 사랑은 눈부시다가도 어두운 골목길에 버려진 듯 무서웠다


 




 그리고 서른이 되었다 불면증에 시달려온 나의 모든 방들을 싼 값에 처분하기로 했다 모든 방들아, 사랑들아, 안녕


 


 


 


 



≪내 피는 불순하다≫(우리글, 2008)에 수록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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