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 아침 겨울 아침 최정 새하얀 얼음꽃 핀 나뭇가지 사이 산등성이를 막 넘어 온 첫 햇살이 부서집니다 작은 새 한 마리가 하얗게 빛나는 나뭇가지에 앉는 순간 짱짱하게 얼어붙은 산골의 정적이 깨집니다 장갑을 벗고 손바닥 가득 햇살을 받아봅니다 혹독한 겨울, 한 줌의 햇살로 산골짜기가 깨.. # 창작시 - 최정/2010-2012년 시 2012.12.23
아궁이 앞에서 2 아궁이 앞에서 2 최 정 조선 시대쯤 지어졌다는 낡은 기와집 건넛방에는 커다란 쇠죽솥이 걸려 있었는데요 아버지는 저녁마다 장작을 넣고 쇠죽을 쑤셨지요 안방 부엌에서는 엄마가 잔솔가지 부러뜨려 아궁이에 불을 지폈지요 무쇠 밭솥에서 구수하게 김이 모락모락 올라왔어요 어둠이 .. # 창작시 - 최정/2010-2012년 시 2012.10.06
아궁이 앞에서 아궁이 앞에서 최 정 산골에 첫서리가 오려는지 오늘따라 아궁이 앞에 앉아 있는 시간이 길어집니다 타닥타닥 장작 타는 소리 초저녁 얼굴을 내민 별들에게까지 들릴 것만 같습니다 여고시절 긴 생머리 청순하던 미선이는 이 시간 남편과 딸의 저녁밥 짓고 있을까 환한 함박웃음 매력적.. # 창작시 - 최정/2010-2012년 시 2012.10.04
산을 한 입 베어 산을 한 입 베어 최 정 텃밭에서 막 따온 쌈 채소 한 바구니 앞에 놓고 된장 싸서 입 안 가득 넣으면 마루에 앉아 마주한 싱그러운 산을 한 입 베어 문 것 같네 바람의 지느러미를 타고 노는 햇살처럼 이 세상 부러울 것 하나 없네 # 창작시 - 최정/2010-2012년 시 2012.05.21
봄비 봄비 최 정 온 산 흠뻑 적시는 봄비 소리 고소하게 들리는 오후 복사꽃 더 붉어지고 조팝꽃 비가 되어 하얗게 내리네 목 타던 풀들 빗소리에 깨어나 한 뼘쯤 훌쩍 자랄 테지 자장가처럼 지붕에 닿는 빗소리에 취해 가물가물 졸음이 쏟아지네 # 창작시 - 최정/2010-2012년 시 2012.05.21
달의 눈 달의 눈 최 정 뒤척이다 눈부셔 깨어 보니 작은 창 가운데 달이 커다랗게 눈을 뜨고 있다 환한 정적 창을 다 지날 때까지 홀린 듯 달과 눈빛을 주고받는다 가슴이 서늘해진다 # 창작시 - 최정/2010-2012년 시 2012.05.21
산골의 하루 산골의 하루 최 정 찬 기운 털고 일어나 아궁이에 불을 지핀다 배추 된장국에 밥 한 술 뜨고 개밥 고양이밥 주고 봄 햇살에 잔설 녹는 소리 들리는 오늘은 춘분 웅크렸던 몸 햇살에 말리며 땔 나무 주워 모으다 고로쇠물 한 사발 들이켜니 내 몸도 고로쇠나무처럼 땅속 깊숙이 뿌리를 뻗을.. # 창작시 - 최정/2010-2012년 시 2012.03.23
버리고 갈 것만 남아 버리고 갈 것만 남아 최 정 냉장고는 고장난지 오래 세탁기는 덜컹덜컹 자주 멈추고 텔레비전 버튼은 잘 눌러지지 않아 다행이다, 버리고 갈 것만 남아 언제고 떠나려 새것 사지 않아 다행이다 아니, 사실은 다행이지 않다 쓸 일 없어진 침대도 들춰본 지 오래된 책들도 하다못해 서랍에 .. # 창작시 - 최정/2010-2012년 시 2012.02.09
막차 막차 최 정 막차, 이 말은 나를 설레게 한다 시외로 가는 차표를 끊곤 했다 여고 2학년 하숙생 시절 낯선 곳을 떠도는 방랑자처럼 나의 설렘은 차창에 부딪치는 바람을 가르며 질주했다 아직 도착하지 않은 나의 미래가 엉킨 실타래처럼 창밖으로 펼쳐졌다 그러나 알고 있었다 하숙집으로.. # 창작시 - 최정/2010-2012년 시 2012.02.06
추석 전야 추석 전야 최 정 기울어진 지붕 아래로 쉴 새 없이 빗물이 흘러내립니다. 다 된 형광등처럼 팔순 노모의 기억력이 깜빡깜빡합니다. 그럴 때마다 내 마음도 같이 깜빡깜빡합니다. 긴 초저녁잠에서 깨어난 노모가 분주하게 움직입니다. 이불을 개고 세수를 하고 옷을 단정하게 갈아 입으십.. # 창작시 - 최정/2010-2012년 시 2011.09.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