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 읽기/좋은시 읽기

박후기 '종이는 나무의 유전자를 갖고 있다'

최정 / 모모 2011. 1. 25. 11:28

종이는 나무의 유전자를 갖고 있다

 

 

                                         박후기

 

 

 

싱크대 옆 선반 위

물이 담긴 유리그릇 속에서

감자 한 알이 소 눈곱 같은 싹을 틔운다

똑똑한 아기 낳는 법,이라고 씌어진

두툼한 책장을 넘기다 말고

고추장 김치 돼지고기가 들끓는

찌개 곁에서 아내가 입덧을 한다

햇볕이 잠시 문밖에서 서성이다

돌아가는 지하 단칸방

식탁 위 선인장이 우울하다

 

아내는 이곳을 판도라의 상자라고 부르지만

나는 그냥 상자라고 부른다

내 몸은 지상의 모든 발 아래 놓여 있어

늦은 밤 사람들의 발소리가 뚜벅뚜벅

내 깊은 잠 속까지 걸어 들어온다

 

내가 살고 있는 상자는

산 아래 강가의 63층 빌딩보다 높은 곳이지만

주인집 은행나무 뿌리보다도 낮은 곳이어서

외벽에 기댄 은행나무의 뿌리가 내벽에

금을 만든다 땅속 어디선가

은행나무의 발가락들이 꼼지락거리며

벽을 긁고 있는 것이다

 

아내의 배 위로 불거진 핏줄이

한 가닥 금을 긋는다

아내의 뱃속에는

꼼지락거리는 손가락이 열 개

발가락이 열 개 그리고

바위의 안부를 묻는 빗방울처럼

쉬지 않고 내세를 두드리는

희망이라는 유전자가 하나

 

 

 

 

박후기, 종이는 나무의 유전자를 갖고 있다》(실천문학사, 2009.(초판 2006))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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