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이는 나무의 유전자를 갖고 있다
박후기
싱크대 옆 선반 위
물이 담긴 유리그릇 속에서
감자 한 알이 소 눈곱 같은 싹을 틔운다
똑똑한 아기 낳는 법,이라고 씌어진
두툼한 책장을 넘기다 말고
고추장 김치 돼지고기가 들끓는
찌개 곁에서 아내가 입덧을 한다
햇볕이 잠시 문밖에서 서성이다
돌아가는 지하 단칸방
식탁 위 선인장이 우울하다
아내는 이곳을 판도라의 상자라고 부르지만
나는 그냥 상자라고 부른다
내 몸은 지상의 모든 발 아래 놓여 있어
늦은 밤 사람들의 발소리가 뚜벅뚜벅
내 깊은 잠 속까지 걸어 들어온다
내가 살고 있는 상자는
산 아래 강가의 63층 빌딩보다 높은 곳이지만
주인집 은행나무 뿌리보다도 낮은 곳이어서
외벽에 기댄 은행나무의 뿌리가 내벽에
금을 만든다 땅속 어디선가
은행나무의 발가락들이 꼼지락거리며
벽을 긁고 있는 것이다
아내의 배 위로 불거진 핏줄이
한 가닥 금을 긋는다
아내의 뱃속에는
꼼지락거리는 손가락이 열 개
발가락이 열 개 그리고
바위의 안부를 묻는 빗방울처럼
쉬지 않고 내세를 두드리는
희망이라는 유전자가 하나
박후기, 《종이는 나무의 유전자를 갖고 있다》(실천문학사, 2009.(초판 2006))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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