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 읽기/좋은시 읽기

김혜수 '챔피언'

최정 / 모모 2011. 1. 19. 17:52

챔피언

 

 

                     김혜수

 

 

 

한 사내가 버스에 오른다

왕년에 챔피언이었다는 그의 손에

권투글러브 대신 들려 있는

한다발의 비누가

세월을 빠르게 요약한다

이 비누로 말하자면

 

믿거나 말거나

세탁해버리기엔 너무 화려한 과거를 팔아

링 밖에서 그는 재기하려 한다

맨 뒷자석의 여자가 단돈 천원으로

한번도 챔피언이었던 적 없는

챔피언의 몰락한 과거를 산다

한번도 그녀 자신이었던 적 없는

자신의 재기를 다짐하듯

 

그를 다시 본 건 달포 후

한강을 막 지나고 있는 전철 안에서이다

비누 대신 그의 손에 들려 있는

한 쎄트의 칼

왕년에 전과자였다는 그가

다시 칼을 뽑는다

이 칼로 말하자면

 

 

 

 

김혜수,《이상한 야유회》(창비, 2010) 중에서

 

 

* 저자 소개 - 김혜수 : 1959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1988년 『세계의 문학』에 「동시상영」 외 3편을, 『문학정신』에 「약속」 외 4편을 발표하면서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시집으로 『404호』가 있다.

 

* 책소개(출판사) - 김혜수 시인이 첫시집 『404호』 이후 무려 19년 만에 선보이는 신작시집. 시인은 사물을 통해 시적 공간을 형성하는 탁월한 감각을 선보인다. 덩그러니 놓인 정적인 대상에 상상력을 가미한 초현실주의적 시들은 시인의 일상에서의 경험과 한데 섞여 풍성한 이야기가 담긴 흥미로운 장면을 펼쳐놓는다. 또한 담담하게 삶과 죽음을 응시하는 시인은 양쪽 어느 곳의 무게에도 짓눌리지 않고, 담담하게 사유하고 자유롭게 시를 쓰고 있다.
 그동안의 오랜 공백이 무색할 만큼 시인은 삶과 죽음에 대한 정교한 시적 인식과 생동감 넘치는 시어로 돌아왔다. 어느 한편 허투루 쓰이지 않은, 시집 전반에 걸친 완성도 있는 면모는, 빛나는 감성과 시에 대한 열정이야말로 시인이라는 이름을 가능케한다는 어쩌면 당연한 사실을 새삼 깨닫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