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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희덕 '뿌리에게'

최정 / 모모 2011. 2. 12. 11:46

뿌리에게

 

 

                          나희덕

 

 

 

깊은 곳에서 네가 나의 뿌리였을 때

나는 막 갈구어진 연한 흙이어서

너를 잘 기억할 수 있다

네 숨결 처음 대이던 그 자리에 더운 김이 오르고

밝은 피 뽑아 네게 흘려보내던 즐거움에 떨던

아 나의 사랑을

 

먼우물* 앞에서도 목마르던 나의 뿌리여

나를 뚫고 오르렴,

눈부셔 잘 부스러지는 살이니

내 밝은 피에 즐겁게 발 적시며 뻗어가려무나

 

척추를 휘어접고 더 넓게 뻗으면

그때마다 나는 착한 그릇이 되어 너를 감싸고,

불꽃 같은 바람이 가슴을 두드려 세워도

네 뻗어가는 끝을 하냥 축복하는 나는

어리석고도 은밀한 기쁨을 가졌어라

 

네가 타고 내려올수록

단단해지는 나의 살을 보아라

아제 거무스레 늙었으니

슬픔만 한 두릅 꿰어 있는 껍데기의

마지막 잔을 마셔다오

 

깊은 곳에서 네가 나의 뿌리였을 때

내 가슴에 끓어오르던 벌레들,

그러나 지금은 하나의 빈 그릇,

너의 푸른 줄기 솟아 햇살에 반짝이면

나는 어느 산비탈 연한 흙으로 일구어지고 있을 테니

 

 

 

 

* 먹을 수 있는 우물물.

 

 

나희덕, 『뿌리에게(창비, 2001.(초판 1999)) 중에서

 

* 나희덕 - 차분하고 잔잔한 분위기 속에서 자연을 존중하고 사랑하는 자연 친화적인 모습을 나지막히 노래하는 나희덕 시인은 1966년 충남 논산에서 태어나 연세대 국문과와 동대학원 박사과정을 졸업했다.   1989년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시 「뿌리에게」가 당선되어 작품활동을 시작, 김수영문학상, 오늘의 젊은 예술가상, 현대문학상, 이산문학상, 소월시문학상 등을 수상했으며 현재 조선대 문예창작학과 교수로 재직중이다. 시집으로 『뿌리에게』『그 말이 잎을 물들였다』『그곳이 멀지 않다』『어두워진다는 것』『사라진 손바닥』, 시론집 『보랏빛은 어디에서 오는가』, 산문집 『반통의 물』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