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 읽기/좋은시 읽기

허 연 '그날도 아버지는'

최정 / 모모 2010. 12. 19. 13:53

그날도 아버지는

 

 

                                                           허 연

 

 

 

 낮술에 취한 아버지는 밥상을 엎고 병을 깨어들었다. 더러운 자식들, 우리가 왜 이래야 되냐고. 어머니는 까무러치듯 쓰러졌고 비가 내렸다.

 

 비명과 함께 달려온 옆집 숙부가 아버지를 가로막았다. 형님 왜 이러세요, 나이 생각을 하셔야지요 나이를. 아버지는 4라운드짜리 권투선수였다. 바닥난 쌀독처럼 주먹을 휘두르던 거리는 이제 아무데도 없었다.

 

 아버지를 빼다 박았다는 나는 아버지를 부정했을까. 삭발까지 했었다는 어머니의 사랑을, 전찻길 따라 달려 가버린 흑백의 세상을 비웃었을까. 언제나 등뒤에서 퍼붓는 이 비가 그칠 거라고. 그날도 아버지는 아무도 찌르지 못했다.

 

 실어증에 걸린 마을 사람들이 돌아간 마당엔 고속도로 공사 때 잘려나가지 않은 대추나무가 한 그루 서 있었다. 당신 분노의 발끝도 모르는 세상 한가운데

 

 

 

허 연, <불온한 검은 피>(세계사, 1995) 중에서

 

불온한 검은 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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