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동양 의학(침뜸)/침뜸 이야기

침과 뜸을 모르면 名醫(명의)가 아니다

최정 / 모모 2010. 12. 30. 16:02

- 이 글은 침뜸 까페에 게시한 '기똥찬' 님의 글에서 발췌하였습니다. -

 

 

침과뜸을 모르면 名醫(명의)가 아니다

 

 

침뜸의학은 오랜 유래와 긴 발전과정을 거쳐왔다.

조선의 침뜸의학을 말하기 전에 간략하게나마 그 유래를 짚고 넘어가는 것이 좋겠다.

일찍이 석기 시대에 돌조각, 즉 돌침(폄석)으로 우리 몸을 누르거나 찔러서 질병을 치료한 것을 침치료의 시초로 볼 수 있다. 또 뜸이라는 ()’ 자는 곧 ()’을 의미하는 것으로 나뭇가지나 풀 등에 불을 붙이거나 뜨겁게 하여 병을 치료하기 시작한 것이 나중에 쑥을 이용하게 되면서 다양하게 발전하게 된 것이다.

 

사회의 발전과 함께 침구학술의 발전도 촉진되었는데, 1973년 중국 호남성 장사시 마왕퇴 3호 한묘에서 출토된 의학백서는 가장 오래된 경락학설의 초기면모를 보여준다. 전국시기 이후 한대에 걸쳐 형성된 동양의학 최고의 원전이라 할 수 있는 <황제내경>은 경락, 경혈, 침구방법 등에 대해 풍부한 내용을 싣고 있어 침구학술 발전에 결정적 영향을 끼치게 된다 

<내경>이라고 간략히 부르기도 하는 이 책은 소문영추로 구성되어 있는데, 특히 영추침경이라고도 한다. 약물요법이 본격적으로 발전하지 못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사실 <내경>에서 가장 비중있게 다루는 치료방법은 약물이 아닌 침뜸요법이다여러 시대를 거치면서 여러 지역에서 여러 의가들의 다양한 이론과 경험이 얽히고 설키면서 매우 다양하고 복잡하게 발전해왔다.

 

일침(一鍼), 이구(二灸), 삼약(三藥)이라고들 한다 

어느 것의 우선을 따지기 이전에, 세 가지 치료수단이 있음을 알려주는 말이다 

침과 뜸 그리고 약물, 이 셋은 전통의학의 대표적인 치료수단이다 

 

명의 손사막(581682)千金方[천금방]에서 이렇게 말한다 

침뜸을 놓고 약물을 써야 한다. 약물만 쓰고 침을 쓰지 않으면 훌륭한 의사라고 할 수 없다. 침을 놓고 약물을 알아야지 진짜 훌륭한 의사다. 이것은 침뜸과 약물이 서로 돕는 작용을 한다는 말이다.”

   

양계주(15221620)라는 침구의 역시 침구대성중의 제가득실책(諸家得失策)’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병이 장위(腸胃)에 있으면 약물이 아니면 건질 수 없고, 병이 혈맥(血脈)에 있으면 침이 아니면 미칠 수가 없으며, 병이 주리()에 있으면 뜸이 아니면 도달할 수 없다. 의사에게는 침과 뜸과 약물 어느 하나도 빠뜨릴 수 없다.

많은 의사들이 병을 치료함에 단지 약물만 사용하고 침뜸은 버리고 있는데 그래서야 어떻게 환자의 원기를 보전할 수 있겠는가?” 이러한 의가들의 주장은 침과 뜸과 약물은 각각의 적응증이 있으며, 의사는 마땅히 질병과 필요에 따라 모든 치료수단을 적절하게 활용할 줄 알아야 함을 강조한 것이다.

 

 

침뜸에 대한 조선사회의 관심  

침뜸 처방은 돈을 들여가며 멀리서 구하는 수고를 안 해도 되며, 준비하기 쉽고 휴대하기도 편하며, 빈부귀천이나 병의 완급에 관계없이 적합지 않을 때가 없고, 하물며 효과에 있어서도 약으로는 기대할 수 없는 바가 있어 그 신묘함을 다 말할 수가 없다 이는 성종 때 중국침구서인 <신응경>을 간행하면서 한계희(14231482)가 쓴 서문에 나오는 내용으로 침뜸치료의 간편성과 경제성, 그리고 치료효과의 우수성 등 침뜸의 장점을 잘 지적했다.

바로 이러한 이유로 인해 침뜸은 어느 시대를 불문하고 거의 환영을 받았다.

이는 일반 백성들에게는 물론이요 국가나 관료들에게도 꼭 필요한 치료수단이었던 것이다.

조선도 초기인 태종 때부터 명에 가는 사신에게 침구도를 가져오게 할 정도로 침구분야에 관심을 보였다.

 

의학교육 때도 침구관련 과목은 필독서로 지정되었고, 여러 침구서적들을 간행하기도 하였다.

세종 때 간행된 <향약집성방>은 수혈 정리에 노력했고, 조선 최대의 의방서인 <의방유취>에서도 상당한 침구관련 서적을 인용하여 싣고 있다허준과 허임으로 이어지는 조선중기 침구학은 이러한 토양 속에서 발전할 수 있었던 것이다. 아울러 이러한 물결은 조선후기로도 면면히 이어져 번침술로 유명한 이형익, 토착적이고 새로운 침법을 이끌었던 사암도인 등으로 발전해가게 된다.

 

아무튼 허임에 대해 <침구경험방>에 발문을 썼던 이경석(15951671)이 한 말을 보자 

()의 기술을 가진 자로 평생 구하고 살린 것이 손으로 다 꼽을 수가 없다그간 죽은 사람도 살리는 등 효험을 많이 거두어 명성을 일세에 날렸으며 침가(鍼家)들이 추대하여 머리로 삼는다.

이는 허임에 대한 당시 세간의 평가를 잘 요약하고 있다.

허임의 생졸년은 대략 15701647이라는 기록이 있으나 확실치는 않다.

실록에 따르면 그는 악공의 아들로 천민 출신이었다.

그런 그가 어떻게 태의에까지 이를 수 있었을까 

당시에는 지방에서 침술로 이름이 높은 이들을 서울로 불러올려 왕실의 진료에 참여시키는 경우가 많았는데, 허임 역시 이런 식으로 등용된 입지전적인 인물이다.

 

허준과 허임의 만남  

그는 선조~광해군대에 걸쳐 침구의가로 크게 활약한다 

왕실의 침의로 활동한 기간은 실록상으로는 선조 31(1598)으로부터 광해군 15(1623)까지의 26년간으로 그의 나이 2954세까지의 기간이다. 이는 그가 20대 후반이라는 젊은 시절부터 거의 일생을 왕실의 침구진료에 참여하였다는 뜻이며, 그의 실력과 꾸준했던 명성을 말해주는 것이다.

 

그는 군왕들을 진료한 공으로 그들의 두터운 신임을 받으며, 6품에서 당상관으로 파격 승진을 하기도 한다.

또 영평, 양주, 부평, 남양 등 경기지방 수령에 임명되어 여러 차례 벼슬을 지내기도 하였다.

허준과 허임, 두 사람이 함께 등장하는 기록도 있다.

두 사람의 관계와 관련하여 선조37(1604) 923일의 왕조실록은 눈여겨볼 만한 장면이다.

밤에 선조에게 갑작스런 편두통이 발작한다. 입시한 의관 허준에게 선조가 묻는다 

침을 맞는 것이 어떻겠는가?”  

 

허준이 아뢴다.  

여러 차례 침을 맞는 것이 송구스럽기는 하지만, 증세가 긴급하니 상례에 구애받을 필요는 없습니다. 침의들은 항상 반드시 침으로 열기(熱氣)를 해소시켜야 통증이 감소된다고 말합니다소신은 침놓는 법을 알지 못합니다허임도 평소에 말하기를 경맥을 이끌어낸 뒤에 아시혈(눌러보아 아픈 곳을 혈자리로 삼음)에 침을 놓을 수 있다고 하는데, 이 말이 일리가 있는 것 같습니다.”

 

잠시 후 병풍이 쳐지고, 남영(南嶸)이 혈자리를 정하고, 허임이 침을 놓는다.

한달 뒤, 대대적인 포상이 따른다. 어의 허준에게는 숙마 1필이 하사되고,

허임과 남영은 6, 7품의 관원에서 당상관으로 파격 승진을 하게 된다.

 

왕실에서의 침구치료 장면을 담은 기록이다. 상당히 좋은 결과를 가져온 성공적인 공동진료였다 

당시 왕실에서는 여러 어의와 침의들이 함께 진료에 임하는 것이 상례였다 

이 기록에 따르면, 어의 허준이 선조의 병에 침을 맞아도 좋을 것인지를 판단하는데, 허임의 견해를 긍정하여 수용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이는 두 사람 사이에 평소 침구에 관한 토론이나 교류가 있었음을 시사해주는 대목이기도 하다물론 당시 이미 노련한 대학자였던 허준에 비한다면 허임은 20여년이나 연하인 풋내기 침의에 불과했다 그러나 허준은 침구학술에 있어서 허임을 존중하는 자세를 보인다. 이러한 상호교류와 신뢰는 이 시대의 침구학 발전을 이끈 발판이 아니었을까?

 

허임이 침의로 왕실에서 활동을 시작하던 때는 허준이<동의보감>의 찬집에 들어간 직후(1598)의 일이다.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새로운 의학에 대한 열망이 고조되던 시대 분위기 속에서 젊은 허임은 대학자 허준을 만나게 되었고, 또 그 영향권 내에서 왕실진료에 참여했다는 사실은 그의 침구의학 형성 뿐 아니라 나중의 <침구경험방>저술에도 중요하게 작용했을 것이다. 어쨌든 젊은 허임이 당대의 명의 허준을 만난 것은 크나큰 행운이었다.

 

실용성 뛰어난 <침구경험방>

30여년의 시차를 두고 나온 <동의보감>침구편과 <침구경험방>은 어떤 차이가 있을까

두 책의 구성방식을 잠깐 살펴보자. <동의보감>에서는 책 맨 뒤에 침구편을 별도로 두었는데 여기서는 침구이론과 경혈을 중심으로 논하고, 질병별 침구치료에 대한 내용은 각 편에 분산 기록하는 이중 구성방식을 택하고 있다.

이는 약물과 침구를 병행하여 종합적으로 치료하기에 편리한 점이 있다.

분량상 <동의보감>전체에서 침구관련 내용이 차지하는 비중은 그리 많지 않다.

이런 사실은 <동의보감>이 종합의서를 지향하고는 있지만, 다분히 약물을 위주로 쓰면서 침뜸치료는 보조로 사용하는 입장이라는 것을 말해 준다. 이에 비해 침뜸만 전적으로 논한 <침구경험방>은 실제 침구치료에 써먹을 수 있는 간결성을 바탕으로 한 실용적 침구서를 지향한다 

그리하여 침구이론의 요약 및 질병별 침뜸치료에 대한 임상경험을 최대한 살리면서 서술하려고 노력한다. 이는 침구임상가 허임으로서는 당연한 일이었을 것이다결과적으로 거의 동시대에 연이어 나온 두 책은 각기 침구이론과 임상에 나름의 체계를 가지면서도 상호 보완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다. 즉 각자의 장점을 유지하면서 서로 부족한 점을 보완해주는 마치 궁합이 잘 맞는 한 쌍의 부부와 같은 침구문헌인 셈이다.

 

뒷날 청대에 이 두 책을 중심으로 <침구집성>이라는 책이 나오게 되는 것도 이런 보완적 가치를 염두에 두었기 때문이라 여겨진다. <침구경험방>은 우리나라 의서로 해외에서 간행된 몇 안 되는 책 중에 하나다.

 

대략 17세기 말18세기 초엽 조선에 유학 왔던 일본 오사카 출신의 의사 산천순암(山川淳菴)은 당시 조선의 의가들이 침구를 중시하는 것과, 그들이 한결같이 허임의 침구방을 이용하고 있는 것을 목격한다.

그는 조선의 침구학이 당시 중국에까지 그 명성을 떨쳤다고 하면서 조선침구학을 높이 평가한다 

후일에 그는 <침구경험방>을 가지고 일본으로 돌아가며, 이를 바탕으로 향보(享保) 10(1725) 일본판 <침구경험방>이 간행된다 <침구경험방>은 후일 안영(安永) 7(1778)에도 간행됐다.

참고로 <동의보감>이 일본에서 1724, 1799년 두 차례 간행된 것과 비교할 때 흥미로운 일이다.

 

중국에서도 최근 한국, 중국, 일본의 학술가치가 높은 전통의학 서적을 발간하는 가운데, <침구경험방>을 침구선본의서로 선정하여 간행하였다아울러 개요를 통해 조선에서 편찬한 침구전문서의 효시로전 책의 내용이 간명하고, 조리가 분명하며, 독특한 특색을 갖추고 있어서 침구임상에 실용성이 있는 참고서다라는 평가를 싣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