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동양 의학(침뜸)/침뜸 이야기

침뜸의 수난

최정 / 모모 2010. 12. 30. 13: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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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북아 지역의 전통의술은 전 세계적 의술로 각광을 받으며 나날이 발전하고 있다. 중국과 일본과 북한에서는 민간에 광범위하게 퍼져 있던 침구인들을 제도권으로 끌어들여 풍부한 경험으로 전승되어온 전통의술의 맥을 잇도록 했다. 또한 전통의술을 현대의학의 바탕 위에 계승 발전시켜 환자의 치료에 활용해 나가고 있다.

미주와 유럽 각 국에서도 동양의 지혜인 침술을 배우고 현대 의료에 적극 활용해 나가고 있다. 그러나 한반도의 남단에서만은 그렇게 널리 활용되던 침뜸이 반세기 동안 침체의 늪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고 있다. 왜 이렇게 되었는가?
첫째, 민간 침구인들이 제도권으로 수렴되는 과정이 한 차례도 없이 핍박만을 당해왔기 때문이다.

둘째, 한약을 중심으로 하는 한의사에게 침구를 독점시켜 침구를 한약 판매의 보조수단으로 전락시켰기 때문이다.

셋째, 전통의술과 현대의학 사이에 서로 넘어가지 못하게 철조망을 쌓아놓아 전통의학의 핵심인 침뜸을 현대적 의학으로 발전시키지 못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전통의술은 대부분 민간에서 광범위하게 전승되어 오는 의술이다. 따라서 전통의술의 맥을 이으려면 일차적으로 민간의료인들의 의술을 검증하여 활용하는 데서 시작할 수밖에 없다.

우리의 전통의술은 일침이구삼약一鍼二灸三藥으로 요약된다.
그런데 우리의 전통의술의 핵심인 침뜸은 해방 이후 대한민국이 건국되고 나서 박해만을 당해왔다.
해방 후 우리 정부가 제정한 최초의 의료관계법은 1951년 공포된 국민의료법. 이 법률은 의사·치과의사·한의사 등을 의료업자로 규정하고 접골·침술·구술·안마술업자 등은 의료유사업자로 정했다. 그런데 보건사회부는 법률에 명시한 대로 의료유사업자제도에 대한 주무부령을 제정하지 않아 침구사 배출이 원천 봉쇄되어 있었다.
연기를 거듭하던 의료유사업자에 대한 주무부령이 제정된 것은 국민의료법이 제정되고 10년 가까이 지난 4.19 이후. 1960년 11월이 되어서야 비로소 의료유사업자령과 자격시험규정이 제정되기에 이르렀다. 침사나 침구사 등의 자격시험은 보건사회장관의 지시에 의하여 매년 1회씩 서울특별시장 또는 도지사가 시행하도록 되어 있었다. 당시 우리나라에는 침사 및 구사 자격시험이 시행되기를 고대하는 이들이 있었다. 문교당국이 인가한 11개의 침구사 양성기관에서 소정의 교육을 마친 5천여명의 졸업생들이었다. 주무부령이 제정됨에 따라 이들 졸업생은 침구사가 될 수 있는 길이 열리는 듯했다.
그러나 자격시험은 단 한 차례도 시행되지 못했다. 5·16 직후인 1962년 3월20일 국민의료법을 전면적으로 개정한 의료법을 만들면서 의료유사업자제도에 관한 규정을 없애버렸기 때문이다. 그 결과 우리나라는 해방 후 한 명의 침구사도 배출하지 못하게 되었다. 다만, 해방 이전에 침구사 자격을 취득한 기旣 자격취득자에 대해서만, ‘당시의 의료유사업자의 자격과 기타 의료상의 권리는 동법同法에 의하여 취득한 것으로 간주한다’는 경과규정을 두었을 뿐이다.
민간 침구인들과 침구사 양성기관 출신자에 대하여는 단 한 차례도 구제의 기회를 주지 않고 있다가 62년 박정희 정권이 등장한 직후 갑자기 침구사 양성제도 자체를 폐지해 버린 것이다. 이것이 우리나라 전통침뜸의술의 맥을 끊는 의료쿠데타 과정이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첩약(약제)의료에 종사하던 사람을 위해서는 1952년부터 매년 검정시험을 실시하여 한의사가 될 수 있는 기회를 부여했다. 이 검정시험규정은 6개월 내지 1년 과정의 단기양성기관(각종 관인학원) 출신자는 물론 무학력으로 한의업(약제상 등)에서 10년 이상 종사한 사람에 대하여도 5년간은 한의사국가시험 응시자격 검정시험에 응시할 수 있는 자격을 부여했다.
한약업 관련 종사자들에 대한 검정시험은 1963년 10월에 의한 공고까지 14회에 걸쳐 이루어졌고 검정시험과 자격시험을 모두 통과해 한의사가 된 사람의 수는 2천명에 이르렀다. 당시 한의사의 수가 3천명 선이었으니 대단히 많은 숫자이다.
침사·구사 등의 양성과 배출에 관한 규정을 삭제하면서 이 업무를 누가 대신할 것인지에 대해서는 법률에 전혀 명시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한의계는 침술과 구술을 한의학적 치료방법이라고 주장하면서 처음에는 강제적으로, 이후에는 암묵적으로 침구시술권을 독점하기에 이르렀다. 보건의료당국은 침구에 관한 학습여부는 물론 능력 여부에 대한 검정도 전혀 거치지 않은 채 한의사들에게 침구시술권을 허용한 셈이다.
보다 큰 문제는 침구술을 모르는 원로 한의사들이 각 한의과 대학의 교수로 재직했다는 사실이다. 첩약전문이었던 의생들이 하나뿐인 한약전문학원을 운영하다 60년대 중반 재정난으로 경희대로 넘어가 의대가 되고 경희의대 내에 4년제 한의과가 생긴 것이 한의대의 뿌리이다.

침과 뜸은 이 땅의 역사가 기록되던 그때부터 백성들의 삶과 함께 해온 탁월한 우리의 전통 민간의술이다. 백성들의 삶 속에 뿌리를 내린 생활의술은 쉽게 없앨 수 없다. 처음부터 민간의술로 백성들 사이에서 활용되어온 침뜸은 들풀 같은 생명력을 가지고 있다. 침술은 그 방법이 간단하고 효과가 빠르기 때문에 언제 어디서든지 아픈 사람에게 손쉽게 시술해 줄 수 있다. 이러한 침술의 특징 때문에 고통스러워하며 한번만 손 봐달라고 찾아온 이웃에게 침을 놔 주게 된다. 그렇게 하여 병이 나으면 금방 소문이 퍼져 찾아오는 사람들의 수가 늘어난다.
정통침뜸을 배워서 봉사활동을 위한 민간자격시험에 합격한 뜸사랑 뜸요법사들의 연수현장

침구양성제도가 없어진 뒤부터는 무면허 침술 행위에 대한 단속이 대단히 심했다. 검문검색 중에 가방 속에 침이 발견되기만 해도 구속되던 시절까지 있었다. 죽을 지경이라며 침을 놔달라고 매달리는 함정 수사에 걸려 침을 놓다가 구속이 되는 사람도 허다했다.
한의사들은 민간 침구인들을 끊임없이 고발하였다. 수지침의 경우도 한의사들의 단골 고발 종목이었다. 그런데 최근 대법원에서 수지침은 민간의술이라는 판례가 나와 일단락 됐다. 침뜸교육의 경우도 한의사들은 눈에 가시처럼 여긴다. 90년대 전반까지만 해도 침뜸을 가르치는 행위조차 불법으로 치부되어 한의사들의 고발이 끊임없이 이어졌다. 95년 모든 강습행위는 원칙적으로 등록을 하지 않아도 된다는 국민고충처리위원회의 결정이 있고 나서야 침뜸교육이 각 사회교육기관에서 대대적으로 활성화되기에 이르렀다.
최근 들어서는 대안대학으로 자리를 잡기 시작한 녹색대학 자연의학과에 침구전공과정이 개설되었다. 또 광주의 송원대학에서는 뜸을 중심으로 교육하는 자연요법학과를 개설하자 지원자가 넘쳐났다.
맹인학교에서는 교육부에서 만든 교재로 침뜸을 전문적으로 교육하고 있다. 지금 맹인 안마사들이 침술원 간판을 내걸고 침시술을 하고 있는 것은 ‘3호 이하의 침은 자극기구다’라는 1988년 보건사회부의 유권해석에 따른 것이다. 이에 대해 침구의 독점을 주장하는 대한한의사협회가 ‘안마사 침술자격 부여처분 무효확인 청구소송’을 내는 등 집요하게 방해해왔지만 맹인들이 생명을 걸고 강력히 반발, 현재까지 유권해석으로 침시술을 하고 있다.
뜸사랑이라는 침뜸봉사단체는 ‘배워서 남 주자!’라는 구호 아래 지금 전국 각지에서 연간 6만명 이상에게 무료진료활동을 벌이고 있다. 그리고 뜸사랑, 정통침뜸연구소, 포천중문의대 대체의학대학원 등은 북한의 전통의학 분야 최고기관인 고려의학과학원과 침뜸학술토론회를 갖는 등 남북침뜸교류에도 적극 나서고 있다. 정부에서 끊은 정통침뜸의 맥을 민간에서 이어나가려고 애를 쓰고 있는 것이다.

 

- 이 글은 (사)허임기념사업회에서 발췌한 것입니다.( http://www.heoi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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