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 읽기/좋은시 읽기

박정만 '종시終詩'

최정 / 모모 2011. 1. 11. 11:36

종시終詩

 

                      박정만

 

 

 

나는 사라진다

저 광활한 우주 속으로

 

 

 

박정만 유서시집, <꽃지는 저녁은 바라보지 말라>(큰산, 2004) 중에서

 

 

 

 

 나는 겨우 술로써 생명을 지탱하고 있었다. 몸은 거의 완벽한 탈진 상태였고, 정신은 기화하는 액체와도 같이 제풀에 흐물거렸다. 새삼 사는 일이 눈물겹게 생각되었지만, 일어나기는 고사하고 이제 자살조차 꿈꿀 힘이 내게는 없었다. 그런데 이상한 현상이 일어났다. 마침내 내 손이 나를 배반하기 시작한 것이었다. 온 몸이 불같이 뜨거워지더니 때없이 구토가 나고 방안이 빙글빙글 돌았다. 머릿속에서는 수만 가지 생각들이 한꺼번에 난마처럼 얼크러져서 빛보다도 빠른 속도로 밀려왔다가 밀려나갔다. 그 많은 생각들을 하는 데 단 1초도 걸리지 않는다는 게 이상했다.

 나는 방바닥에 배를 깔고 엎드린 채 원고지를 앞에 놓고 펜대를 잡았다. 그리하여 어떤 보이지 않는 손의 인도에 따라 머릿속에 들끓는 시어의 화젓가락으로 시를 쓰기 시작했다. 한 편을 쓰고 나면 또 한 편의 시가 미리 대기하고 있었다.

                                             - 1988년 2월 '그 처절했던 고통의 시간들' 중에서 (박정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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