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 읽기/좋은시 읽기

곽재구 '沙平驛에서'

최정 / 모모 2011. 1. 13. 13:02

 

沙平驛에서

 

 

                       곽재구

 

 

 

막차는 좀처럼 오지 않았다

대합실 밖에는 밤새 송이눈이 쌓이고

흰 보라 수수꽃 눈시린 유리창마다

톱밥난로가 지펴지고 있었다

그믐처럼 몇은 졸고

몇은 감기에 쿨럭이고

그리웠던 순간들을 생각하며 나는

한줌의 톱밥을 불빛 속에 던져주었다

내면 깊숙이 할 말들은 가득해도

청색의 손바닥을 불빛 속에 적셔두고

모두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산다는 것이 때론 술에 취한 듯

한 두름의 굴비 한 광주리의 사과를

만지작거리며 귀향하는 기분으로

침묵해야 한다는 것을

모두들 알고 있었다

오래 앓은 기침소리와

쓴 약 같은 입술담배 연기 속에서

싸륵싸륵 눈꽃은 쌓이고

그래 지금은 모두들

눈꽃의 화음에 귀를 적신다

자정 넘으면

낯설음도 뼈아픔도 다 설원인데

단풍잎 같은 몇 잎의 차창을 달고

밤열차는 또 어디로 흘러가는지

그리웠던 순간들을 호명하며 나는

한줌의 눈물을 불빛 속에 던져주었다.

 

 

 

 

곽재구, 『사평역에서』(창비, 1995.(초판 1983)) 중에서

 

* 곽재구 - 이제는 중견이 된 시인 곽재구의 처녀 시집 『사평역에서』는 1983년 5월25일 초판 발행을 시작으로 작년 10월에 개정판 15쇄를 찍었다. 강산이 변해도 두 번은 변했을 동안 10만 부가 넘게 팔렸다고 하니 정말 `스테디셀러'라고 할 만하겠다.

『사평역에서』는 곽재구 시인의 눈에 비친 세상 이야기들로 가난한 냄새가 흠뻑 배어 있다. 암울한 시대를 힘겹게 살아가는 사람들-동명동 청소부, 중동에 간 요리사, 창녀, 선생님, 용접공, 자전차포 점원 등-이 그의 시들의 주인공이다. “송화처럼 탄재가 날리는 용산역에서 새벽 김밥을 팔고” “가까운 고향도 갈 수 없는” 처지에 “일 년 반 동안 세 번을 이사”하기도 하는 그들에게 세상은 고되고 힘겹다. 그러나 그들은 `절망'에 대하여 노래하다가도 “사랑은 가고 누구도 거슬러올라 오지 않는/절망의 강기슭에 배를 띄우며/우리들은 이 땅의 어둠 위에 닻을 내린/많고 많은 풀포기와 별빛이고자 했다.” (「절망에 대하여」)며 희망을 싹 틔운다.

곽재구 시인의 시들은 서정적이고 아름답다. 도시 노동자들의 삶을 노래하면서도 그는 비루한 그들의 삶에 피어 있는 조그만 들꽃을 발견해내는 섬세한 눈을 가지고 있다. 『사평역에서』에서 시작하여 『서울 세노야』에 이르기까지 그는 현실에서 억압 받는 삶에 대하여 서정적으로 노래해왔다. 80년대를 노래한 시들은 많다. 80년대를 겪은 이들에게 분노는 `근본 감정'이다. 그 분노를 비판 의식으로 끌어내 새로운 힘을 만들어내야 사회는 변화할 수 있을 것이다. 80년대를 노래했던 많은 시들은 그저 분노에 찬 절규와 외침으로 끝나버리기도 했다. 이러한 때 곽재구 시인의 시들은 신선한 충격이었을 것이다. 그의 분노는 아름다운 시어들을 통해 가슴에 와닿았기 때문이다.

남루한 현실, 힘겨운 현실을 노래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시들이 아름답게 느껴지는 이유는 아마도 `사랑' 때문일 것이다. 그는 근본적으로 현실과 세상을 사랑하고 있다. 그에 대한 사랑으로 인해 그는 어쩌면 더 심한 가슴앓이를 하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사람이 사람을/사랑할 날은 올 수 있을까/미워하지도 슬퍼하지도 않은 채/그리워진 서로의 마음 위에/물 먹은 풀꽃 한 송이/방싯 꽂아줄 수 있을까......”(「바닥에서도 아름답게)). 『사평역에서』에서는 이제 막 시인의 길에 들어선 젊은 글쟁이의 현실에 대한 고뇌가 잘 드러나 있다. 그는 사랑의 편지를 쓰는 와중에도 용접공인 동생이 건네는 때묻은 만 원권 지폐 한 장에, 팔 년 만에 졸업하는 대학과 어머니가 사 들고 오는 봉지쌀에 묻은 가난을 외면할 수 없는 젊은 글쟁이였다.

시집『사평역에서』(1983)『전장포 아리랑』(1985)『한국의 연인들』(1986)『꽃보다 먼저 마음을 주었네』(1999년) 등과 기행산문집『내가 사랑한 사람 내가 사랑한 세상』(1993), 창작장편동화『아기참새 찌꾸』 (1992) 등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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