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동양 의학(침뜸)/침뜸 이야기

인류 침술 발전사

최정 / 모모 2012. 1. 12. 14:15

# 이 글은 daum 블로그 <의통구호군>에서 카피한 자료를 일부 발췌한 것입니다.

 

[인류 침술 발전사]

1. 침술의 발생

침술은 인류의 역사와 거의 동일하다고 보고 있지만 정확히 언제 시작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선사시대 인류가 주술적인 의미에서 날카로운 도구로 사람의 몸을 찔러 피를 내고 악귀를 쫓아 질병을 퇴치한 유래에서 시작되지 않았나 어렴풋이 짐작할 뿐이다. 처음엔 무당의 주술적인 목적으로 그 행위가 비록 치료의 목적이 아니었다 해도 반복되는 행위가 질병치료에 효과가 있다는 것을 점차로 알게 되어 침술로 발전하게 되었다고 보고 있다.

 

선사인류의 주술사(呪術師)들이 행하여 온 질병치료가 언제부터 계통적인 침술로 자리 잡기 시작했을까? 기록은 희미하지만 신석기시대부터 폄석(貶石)과 골침(骨針)을 사용하여 왔고, 청동기시대에는 금속(金屬針)을 만들어 사용해온 것으로 미루어, 아마 신석기 시대부터는 근대와 거의 동일한 계통의 침술이 자리 잡고 있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이와 같이 고대의 주술사의 중요 임무는 인간의 질병을 치료하는 의자(醫者)의 역할이었음이 여러 가지 고증으로 알려져 있다.

 

옛날에는 ‘의자(醫者)’를 ‘의(醫)'자 밑에 무당의 ‘무(巫)’자를 썼으나 세월이 지나 언제부터 인가 의자들이 술(酒)을 소독용으로 사용하게 됨에 따라 ‘의(醫)’자 밑에 ‘주(酒)’자의 ‘유(酉)’로 대체되어 오늘날의 ‘의(醫)’자로 구성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고대 ‘의자(醫者)’들은 소리를 내어 굿을 하고, ‘폄석(貶石)’으로 살을 찢어 피를 내고(침), 입으로 고름을 빨아내고(부항), 나무 잎이나 나무껍질로 상처를 싸매어(약초) 질병과 상처를 치료했던 것이다.

 

[설문해자(說文解字)]에서 “무팽(巫彭)이 처음으로 의자(醫者)가 되었다(古者巫彭初爲醫)”는 기록이 있다. "무팽(巫彭)"이란? 고대의 질병치료 관직이름으로 무팽(巫彭), 무함(巫咸), 무방(巫妨), 무상(巫相) 등이 있었으며, 이들을 무사(巫師)라 하였는데, 이들은 병자들을 대상으로 주술(呪術;신앙), 폄석(貶石;침술), 초액(草液;탕약)을 사용하여 질병을 다스렸고 민중들 위에 군림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때부터 역학(易學);복희씨), 침학(鍼學;황제씨), 약학(藥學;신농씨)은 서로 분리되어 별개의 학문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더구나 [주례(周禮)]에 기록된 내용을 보면, 당시 의자(醫者)들도 전문 업무에 따라 침의(鍼醫), 약의(藥醫), 식의(食醫), 질의(疾醫),양의(瘍醫), 수의(獸醫)로 분류되어 있었다. [사기(史記), 편작열전(扁鵲列傳)]에서도 “무술을 믿고 의자를 믿지 않으면 질병을 치료하지 못한다.(信巫而不信醫則不治).”라고 하여 편작(扁鵲;기원전 5세기;戰國時代, 渤海人;扁鵲內外經) 당시에는 의자들이 전문 분야별로 구별하여 치료한 것으로 역사는 말하고 있다.

 

고대 주술사가 사용했던 인류최고의 ‘침(鍼)’ 폄석(貶石)이 한반도 "함경북도 경흥군 웅기면 송평동" 패총유적에서 발견되어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중이 소장하고 있는 것은 고고학적 사실임으로 “한반도가 침술의 종주국"이라는 것은 부인 할 수 없는 역사적 사실이다.

 

 

2. 상고시대 침구술

1923년8월 9일 함경북도 경흥군 웅기면 송평동 패총 유적지에서 발굴된 돌침 폄석(貶石)은 인류역사상 가장 오래된 침으로서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 보존 소장하고 있다. 폄석이 중국(支那;China)의 은허지(殷墟地)에서 발굴된 것이 있지만, 송평동 출토 폄석에 비하여 그 연대가 훨씬 뒤의 것으로 감정되고 있다. 송평동 폄석은 기원전 6,000여 년 전에 사용하던 것으로 추정되어 치료용 도구로는 인류 최초, 인류 최고의 것이다.

 

단군조선 개국 년대와 비슷한 기원전 2,300여 년경 한반도인(靑丘人)으로서 단군 임검(檀君壬儉;기원전2,333-295년)의 명을 받아 지나(China;지금의 중국)를 통치하러 파견되어 갔던 황제 헌원(黃帝 軒轅)이 기록한 [황제내경黃帝內經]은 동양의술의 경전(經典)으로 추앙받는 것은 모두 한반도의 고대의술 침술(폄석술)이 전수되었기 때문이다.

또한 치우천황 시대에는 청동기시대를 여는 치우천황의 구리 갑옷을 위시한 구리구침(銅九鍼)을 만들어 질병을 치료했고 기원전 200년 경 철기시대가 열리면서 철침鐵鍼, 금침金鍼, 은침銀鍼으로 다양한 침들이 발달하게 되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폄석(貶石)은 마제석기(磨製石器)시대에 점판암(粘板岩)을 갈아 만든 예리한 도구로서 통증, 마비증 등 아픈 곳을 찔러 자극하던 인류 최초의 치료용 침이다. 마제석기시대를 기원전 25,000-6,000년경을 추정한다면, 돌침 폄석은 한단고기의 한국시대(桓國時代) 또는 그 이전의 인간 생활에서 질병 치료를 치료하기 위한 수단의 한 방법이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므로 ‘침술(鍼術)’은 ‘우리 민족문화의 뿌리’로서 ‘전통치료기술’인 것이다.

 

[황제내경 소문(素問) 권제4 이법방의론편(異法方宜論篇)]에서 “폄석 역시 동방으로부터 전래되었다(貶石者亦東方來)” 라고 기록되어 있고, [산해경山海經]에서 “동방에서 먼저 돌로 만든 폄석이 생산된다”는 기록이 있고, [통현지요부通玄指要賦]에서 “요동 동쪽遼東以東에 폄석을 이용한 치료술이 발달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이는 중국 역사가 침술의 발상지와 종주국이 한반도임을 증명하고 있는 것이다.

 

 

3. 삼국시대 침구술

[삼국사기(三國史記)]에 의하면, “고구려 평원왕(平元王) 원년(기원후564년) 오(吳)나라 사람 지총(知聰)이 내외전(黃帝內外典), 약서(藥書), 침구명당도(鍼灸明堂圖)를 가지고 왔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 기록은 침술이 고구려에 역수입된 기록일 뿐이며, 위에서 서술한 봐와 같이 우리 민족의 잃어버린 역사에서 이미 단군선술(檀君仙術), 폄석술(貶石術), 구침술(九鍼術), 사암경(舍巖經) 등, 민족 고유한 전통 침술을 보유하고 있었는데도 사대주의 사관은 침술이 처음 수입된 것처럼 기록된 것이다.

 

또한 [삼국사기 직관지職官誌]에서 “신라 효소왕(孝昭王) 원년(기원후692)에 처음으로 의학(醫學)을 설치하고 약박사(藥搏士), 침박사(鍼搏士) 2명을 등용하여 본초경(本草經), 갑을경(甲乙經), 소문(素問), 침경(鍼經), 명당경(明堂經), 난경(難經) 등을 가르쳤다”고 기록하고 있다.

 

여기서도 침술이 이미 국가적으로 공인되어 신라의 서민들에게까지 침술의 혜택을 누리고 이었던 것으로 알 수 있다. 일본의 고서 기록에서 “변기남마邊畿男磨라는 사람이 신라에서 침술을 배우고 일본 황극천황(皇極天皇) 원년(신라 선덕왕 11년)에 일본으로 돌아와 침박사(鍼博士)가 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이는 침술이 외국으로 유학생까지 받아들여 가르쳐 보냈음을 알 수 있다.

 

 

4. 고려시대 침구술

신라의 제도를 그대로 물려받은 고려는 태조 왕건(王建) 13년에 서경平陽에 방문하여 학교를 설치하고 후에 의복과(醫卜科)를 특설하였다. 제4대, 광종(光宗) 9년에 과거제도를 시행하여 여러 과목별로 인재를 선발 등용하였는데, 당시 학교에서 가르친 침술, 복술, 약술의 과목도 선발했을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제6대, 성종(成宗) 초년에 각 주(州), 군(郡), 현(縣)의 자제들을 경사(京師;開京)에 모아 경학(經學), 침학(針學)을 가르쳤는데 사정에 따라 돌아가는 자가 있어 12개 지방의 목사(牧使)에게 경박사(經博士), 침박사(針博士)를 보내어 지방에서 직접 가르치도록 조치하였다는 기록도 있다. 또 성종 8년에 시어의(侍御醫), 태의(太醫), 의정(醫正), 상약(尙藥), 직장(直長) 등의 직제(職制)를 두었다는 기록도 있다.

 

제7대 목종(穆宗) 때에 이르러 태의감(太醫監)을 설치하고 태의감 아래 소감(小監), 승(丞), 박사(博士), 의정(醫正)의 직급을 두었고, 어약(御藥)을 맡은 상약국(尙藥局)을 별도로 설치하고, 이곳에는 봉어(奉御), 시어의(侍御醫), 직장(直長), 의좌(醫佐) 등의 직급을 두었다.

 

제13대 문종(文宗) 때에는 의료제도를 대폭 확충하여 중앙에는 태의감(太醫監), 상약국(尙藥局), 사선서(司膳署)를 설치하고, 태감에는 판사(判事), 감(監), 소감(小監), 박사(博士), 승(丞), 의정(醫正), 조교(助敎), 주업박사(呪業博士), 의침리(醫鍼吏) 등의 직급을 두었고, 상약국(尙藥局)에도 추가로 의침리(醫鍼吏)를 두도록 하여 약(藥)과 침(鍼)이 분리하고 있으나 협동 진료체제를 갖추도록 하였다.

 

사선서(司膳署)에는 봉어(奉御), 직장(直長), 식의(食醫) 등을 두었으며, 각 지방에는 사태의감分(司太醫監), 판감(判監), 지감(知監)이 있고, 오경(五京)에 유수관(留守官)을 두며, 대도호부(大都護部)와 각 방어진(防禦鎭)에도 의사(醫師)를 두게 하였다. 또한 서민의 질병을 치료하는 관청으로 동서대비원(東西大悲院)과 제위보(濟危寶)를 설치하고, 약리(藥吏)와 침리(鍼吏)를 배치하였고, 각 지방 관아(官衙)에도 제사(諸司), 도감(都監), 각색(各色)을 설치하게 하였다. 다른 과거와 달리 의과과거(醫科科擧)에는 각 주현의 호정(戶正)급 이상의 자제들에게만 국한하지 않고 널리 평민의 자제들에게도 응시자격을 주도록 확대하였다.

 

 

5. 조선시대 침구술

조선 태조(太祖) 원년 8월에 입관보리법(入官補吏法)을 제정하고 문과(文科), 무과(武科), 역과(譯科), 리과(吏科), 의과(醫科) 등 분야별 과거제도가 실시되었고, 문, 무 양반(兩班) 제도를 설치하면서 동반(東班) 산하에 전의감(典醫監), 혜민국(惠民局), 동서대비원(東西大悲院)을 두었다.

 

태조 2년 각 도에 의학교수(醫學敎授)를 보내어 의원(醫院)을 설치하게 하였으며, 교수관(敎授官) 밑에 채약정부(採藥丁夫)를 배치하였다. 태조 6년에 서민의료기관으로 제생원(濟生院)을 신설하였다.

제3대 태종 5년에 전의감, 혜민국, 동서대비원, 제생원을 호조(戶曹)에 소속하게 하고 교육기관으로 중앙과 각도에 의학(醫學)과 종약색(種藥色)을 하나씩 설치하였다. 태종 6년 의녀(醫女) 제도가 실시되어 제생원에 배치하고 부녀자의 질병을 돌보게 하였다.

 

제4대 세종 12년 의녀에게 산서(産書)를 가르쳐 산파(産婆)의 임무를 겸하게 하였다. 또한 의과(醫科)는 잡과(雜科)의 일부로 부정기적으로 과거가 실시되던 것을 1년에 4회 사맹월(四孟月;1월, 4월, 7월, 10월)에 정기적으로 실시하도록 하였다. 그 교과로는 직지맥(直指脈), 찬도맥(纂圖脈), 직지방(直指方), 화제방(和劑方), 상한유요(傷寒類要), 화제지남(和劑指南), 의방대성(醫方大成), 어약원방(御藥院方), 제생방(濟生方), 제생발췌방(濟生拔萃方), 쌍종처사활인서(雙宗處事活仁署), 연의본초(衍義本草), 향약집성방(鄕藥集成方), 성제총록(聖濟總錄), 위씨득효방(危氏得效方), 두씨전령(杜氏傳零), 부인대전(婦人大全), 서죽당방(瑞竹堂方), 백일선방(百一選方), 천금익방(千金翼方), 우마방(牛馬方) 등 탕약처방 의서들과 침구경(鍼灸經), 보주동인경(補註銅人經), 난경(難經), 소문(素問) 등 침구처방의서 들이 매우 광범한 교육과목이 지정되었다.

 

또한 세종대에서 침구전문과(鍼灸專門科)를 실시하여 전의감(典醫監), 혜민국(惠民局), 제생원(濟生院)에 각각 배치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일반 서민들을 위하여서는 민중(衆生)의 환고구제(患苦救濟)를 위하여 승려들이 수도과목의 하나로 침구술(鍼灸術)을 반드시 공부하였고, 선비들은 “부모를 섬겨 효양하기 위해서 선비가 해야 할 한 가지 공부가 의학이다(事親孝養 儒者之一事醫也)”라고 하여 식자층은 의학공부를 필수과목으로 중요시하였다.

"소설 동의보감"이 TV에 방영되며 ‘허준’영웅화시키기 위해 침, 약 모두를 허준이 한 것처럼 부각시켜 국민들이 모두 오도하고 있는 것은 통탄하지 않을 수 없다. 사실 조선왕조 실록에 보면 허준 당시에도 "침의"와 "약의"가 따로 있었다.

 

 

6. 근·현대 침구술

(1) 일제 시대 침구술

조선을 강점한 일본은 변변한 교육기관도 없이 민간 또는 개인적으로 전래되어 오고 있는 한국의 전통 침, 뜸, 접골, 안마, 지압, 부항술을 정비 체계화하기 위하여 1914년 10월 조선총독부(朝鮮總督府) 경령(警令) 제10호(第10號)로 ‘안마술(按摩術), 침술(鍼術), 구술(灸術)의 영업 취체규칙을 발포하여 안마사(按摩士), 침사(鍼士), 구사(灸士)의 자격증제도를 실시하였다.

 

1944년 3월 23일 부로 경위(京衛) 제111호로 종전의 침술, 구술을 업자(業者)라는 명칭으로 침사(鍼士), 구사(灸士)로 공식 개칭하였다. 그러나 당시에 국내에 침구를 가르치는 교육기관도 없고, 따라서 자격시험제도도 없어 실행하지 못한 가운데 개인적으로 습득한 안마사, 침사, 구사를 신고로서 담당 관리의 면담인정으로 도지사의 면허증을 발부 받아 의원을 신설할 수 있었다.

 

(2) 미군정 시대 침구술

8·15 해방이 되자 한반도의 38선 이남에는 ‘맥아더’ 극동군사령부, 38선 이북에는 소련군 사령관이 진주하여 예하 주한 미·소 군정청을 두었다. 미 군정청은 일본과 한국에 군정을 펴면서 ‘침구술은 비과학적인 원시의술’ 이라는 이유로 한국과 일본의 고유의술인 안마사, 침사, 구사 자격증제도를 말소해버리고 말았다.

 

그러나 일본에서는 기존 침구사들이 조직적으로 맥아더사령부에 대항하여 항의 시위를 벌림으로서 자격증제도가 부활이 되었지만, 한국에서는 항의하는 사람이 없어 말살된 그대로 기정사실이 되고 말았다. 한국에 주둔한 하지 군정청장도 한국의 유구한 전통의술을 이해하지 못하고 서양 의학적 편견에서 침술을 야만시한 나머지 제도를 말살한 것이다.

 

그러나 대한민국 건국 이후에도 서양풍조 우월주의에 빠진 지식층들과 정치인들은 우리의 고귀한 정신문화와 전통문화를 스스로 훼손한 우매한 일을 저질렀으니 그 중에서 6000년 동안이나 민족의 명맥(命脈)을 유지한 귀중한 유산인 민족의술 “전통 침구술”을 폐기한 짓거리는 역적 같은 무지몽매한 망동이 아닐 수 없다. 그 피해가 4천만 온 민족의 민생에 물량으로 환산할 수 없는 막대한 손실을 끼친 것은 두말 할 필요도 없다.

 

(3) 대한민국 침구술

대한민국 건국 이래 이승만 자유당정권부터 침구인들은 집요하게 침구사 제도 부활을 요구해 왔으나, 자유당독재정권의 서양의사 출신 보건사회부장관이 의식적으로 민원을 묵살하여 와 그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4·19 혁명 후에 들어선 장면(張勉)의 민주내각정부에서 ‘침구사제도’가 “의료유사업자”로 의료법에 부활되어 자유 민주를 외치고 전통 민족의술 침구사제도 부활을 외치던 민주화의 봄을 맞게 되었다. 환호와 영광도 그만, 무식한 군인들이 5·16 쿠데타를 맞아 박정희(朴正熙) 공화당 정권이 시작되며 군의관 출신 보건사회부 장관이 천신만고로 부활시켜 놓은 ‘침구사제도’를 감언이설과 독단전횡(獨斷專橫)으로 1963년 다시 말살해 버리고 말았다.

 

그 이후 침구계의 집요한 민원이 계속 제기되었고, 청원 법안이 박정희 공화당정권 말기까지 국회에 연속 4차나 상정이 되었지만 군사독재 정치체제하의 부패한 정치풍토 속에서 한의사들의 물량공세에 매수되어 심의도 제대로 해보지 못하고 폐기되는 악순환이 되풀이되었다. 또한 “침구술은 한의학의 일부” 라는 역사적으로도 부합되지 않는 감언이설로 한의사들의 집단이기주의 ‘로비’에 야합된 의료정책 당국은 청문회도 한번 열어 본 적 없이 “침구술은 한의사만이 할 수 있다”는 법에도 없는? 법을 무시한 편파적이고 독단적인 유권해석을 내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