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 읽기/좋은시 읽기

권지숙 '밤길'

최정 / 모모 2012. 2. 22. 10:45

밤길

 

 

 

                                                권지숙

 

 

 

 

반달이 희미하게 비춰주는 산길을 엄마와 가고 있다 어디로 가는지

왜 가는지 엄마는 말하지 않고 나도 묻지 않았다 오일장이 서는

장터 가는 길 내 동무 양순이네 집으로 가는 길 너무도 익숙한

그 길을 엄마는 내 손을 꼭 잡은 채 땀이 배도록 꼭 잡은 채

앞만 보고 가고 있다 부엉이 우는 소리에 머리끝이 쭈뼛선다

 

 

엄마가 찾아간 곳은 장터 끝 작은 집 엄마는

망설임 없이 찔레덩굴 우거진 뒤꼍을 돌아 작은 봉창 틈을

오래 들여다본다 나는 갑자기 오줌이 마려워서 동동거리다가

뒤곁 모서리에 앉아 오줌을 눈다 대여섯살 적의 일이다

 

 

돌아가는 길은 달이 구름 속에 숨어 온통 깜깜했고 엄마는

몇번이고 발을 헛디뎠다

그날 밤에도 아버지는 집에 들어오시지 않았다

 

 

 

 

권지숙, 『오래 들여다본다(창비, 2010) 중에서

 

* 저자 소개 : 권지숙 - 1949년 경남 진주에서 태어났다.

1975년 『창작과비평』 여름호에 「내 불행한 아우를 위하여」 외 4편을 발표하며 작품활동을 시작했고, ‘반시(反詩)’ 동인활동을 했다.

 

 * 책소개(출판사) - 1975년 계간 〈창작과비평〉에 「아우를 위하여」(발표 당시 「내 불행한 아우를 위하여」) 등을 발표하며 문단에 혜성처럼 등장했으나 스스로 작품활동을 중단하고 문단에서 자취를 감추었던 권지숙 시인이 시집을 펴냈다. 등단 35년 만의 첫시집이라는 보기 드문 점과 함께 문단에서 멀어졌지만 시에 대한 열정으로 오롯이 시인으로 살아낸 그의 삶 자체라는 점에서 이 시집은 더욱 빛을 발한다.
 70년대에 시단에 나온만큼 그의 시에는 그 시대의 암울함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폭력과 억압이 만연하고 투쟁과 죽음이 일상화된 희망이 보이지 않는 사회에서 시인은 늘 밤길을 걷는 듯한 막막함을 느낀다. 힘겹고 외로운 삶 속에서 시인은 깊은 외로움과 절망을 느끼지만, 그는 이 고독과 비애 속에서 때로 어렵게 아름다움을 길어올린다. 시인이 기나긴 시간 속에서 건져올린, 현란한 수사나 의도적인 주제와는 완전히 결을 달리하는 담박한 아름다움의 깊은 감동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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