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출
최 정
고3의 봄은 긴장의 연속이었다. 어느 날 친구가 교과서를 몽땅 맡아 달라고 했다. 학교를 떠나겠다고 했다. 대학 말고 다른 인생이 있다는 걸 보여주겠다고 했다. 친구는 전교 1등이었고 학생회장이었고 공무원인 아버지도 있었다.
‘넌 너무 교과서적이야.’ 이 말을 남기고 사라졌다. 사형선고 같은 이 한 마디에 나의 십대는 처형당했다. 친구 어머니가 울며 찾아왔고 할머니는 기절했다. 연락처를 말하라고 온갖 협박을 받았다. 나는 몸무게가 급격히 줄었다.
절대 돌아오지 않겠다던 친구는 삭발하고 열흘 만에 나타났다. 전학을 간다고 했다. 이미 내 마음은 ‘교과서’와 싸우고 있었다. 가난한 부모님을 배신할 수 없었다. 거대한 감옥 같은 학교에서 숨 쉬기 위해 자주 운동장을 걸었다.
뒤늦은 가출처럼 대학 생활이 시작되었다. 어두운 골목길을 쏘다니며 거꾸로 된 세상을 찾아 나섰다. 지뢰라도 밟고 싶었다. 안전한 보호막 같은 껍데기를 벗어 던질 수 있다면.
≪내 피는 불순하다≫(우리글, 2008)에 수록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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