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 읽기/좋은시 읽기

박후기 '묵'

최정 / 모모 2010. 12. 17. 13:35

                                          

                                                    박후기

 

 

 

주점 홍등 아래 앉아

묵을 먹는다

청춘을 잃고 뒤늦게

연약을 매만지는 법을 배운다

잡힐 듯 말 듯

의심 많던 손아귀에서 끝내

부서져버린 첫사랑을 생각한다

움켜진다고 가질 수 있는

사랑이 아니었으므로,

탕진한다고 벗어날 수 있는

오늘이 아니었으므로

돌아갈 여자도

도망칠 내일도 없던 날들이었다

다시, 교문 앞에 돌아와

묵을 먹는다

젓가락질은 여전히 서툴고,

정든 화실 앞에서

첫사랑은 아직도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다

제 살을 베는 칼날

묵묵히 받아들이며 쓰러진

묵을 먹는다 어느덧

뜨거운 가슴 식어버려

몸에 칼이 들어와도

피 한방울 흐르지 않는

나를 먹는다

 

 

 

 

박후기의 <내 귀는 거짓말을 사랑한다>(창비, 2010(초판 2009))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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