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 읽기/좋은시 읽기

이선영 '어느 대낮에 스치는 생의 풍경'

최정 / 모모 2010. 12. 16. 11:54

 어느 대낮에 스치는 생의 풍경

 

                                                   

                                                  이선영

 

 

 

 때로 트럭에서 떨어져내린 배추 몇포기가

 야채장수로 하여금 대로를 무단횡단하는 모험을 감행하게 한다

 그냥 갈 수도 있었다 고작 몇푼 안되는 것, 그렇지만 아직 멀리 온 것은 아닌데, 여전히 눈에 밟히는데

 무 배추 가득 실은 소형 트럭에는 비상등이 켜져 있고

 야채장수는 도로 한복판에서 잃어버린 배추를 향해 조심스레 걸음을 옮기고 있다

 그러나 그 기다림도 너무 지루하다는 듯 순식간에 배추 포기는 누군가의 차바퀴에 몸을 던진다

 속도의 쾌감을 누리려 하는 이, 이 짓밟는 자의 심보가 어떤 맛인지를 아는 이, 아 하찮은 것이라도 좀 피해갈 줄 아는 사려 깊은 이였다면 좋았을 걸을

 야채장수 당신도,  기왕 작정한 거, 차라리 트럭으로 대로 한복판을 막아서는 대담함이 있었다면 어땠을까

 사소한 것이라도 잃었던 것을 되찾는 데는 무릅쓰고 나서는 용기가 필요한 것 아닐까

 도로 위에 흩어진 배춧잎들

 야채장수의 다리는 갈피를 잃고

 이제 공중에 흩날리는 그것이,

 이제 쓸모없는 깃털에 불과한 그것이,

 왠지 단번에 늘어져버린 제 인생의 힘줄인 것 같다고

 아스팔트 위에 혼자만 물컹하게 서서 그는 생각하고 있는 것일까

 

 

 

 이선영의 <포도알이 남기는 미래>(창비, 2009)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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