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동양 의학(침뜸)/침뜸 이야기

침뜸의 역사

최정 / 모모 2010. 12. 30. 13:36


원시시대 종기 등 외과적 시술에 쓰이기 시작한 침술의 발상지는 조선을 비롯한 동방지역이다.

근육통 등을 치료하던 가느다란 침은 남방에서 왔고, 뜸은 불을 가까이 하던 북방에서 개발됐다.

침뜸술이 중국 본토보다는 동방과 남방과 북방지역에서 나와서 문자로 기록되면서 중국 본토의학으로 발전되었다.

중국의 침구에 대한 서적이 한반도와 일본에 전해진 것은 고구려 평원왕 원년(서기 564년)이라고 한다.

중국 강남의 오吳나라 사람 지총知聰이 침구명당도鍼灸明堂圖 등을 가지고 한반도로 들어 왔다가 일본으로 갔다고 전해진다. 이렇게 하며 동북아지역의 전통의술로 자리를 잡은 침과 뜸은 현대의학이 밀려들기 전까지 질병을 치료하는 핵심적인 의술로 백성들의 생활 깊숙이 자리를 잡아갔다.

즉 침과 뜸이 동북아지역에서는 ‘대체의학’이 아니라 ‘정통의학’인 것이다.
침뜸은 고려시대부터 점차 전문업종으로 발전하기 시작하다가 조선시대에는 침구의鍼灸醫 제도가 마련되었다. 세종실록에는 “중추원 부사 황자후黃子厚가 건의하여 침구針灸를 전문으로 하는 업종을 창설하였고, 가을에 중추원사로 승진하였다. 자후는 의약에 밝아 항상 전의감典醫監 제조提調로 있었다.”란 구절이 있다. 실록에는 조선시대 침구를 전문으로 하는 업종의 창설과정이 소상히 기록되어 있다.
세종은 침뜸전문생을 매년 3명씩 선발하여 전의감, 혜민국, 제생원의 삼의사에 한 명씩 배속시켰다. 침구전문의생이 관직을 받을 수 없는 경우는 사역원별재생司譯院別齋生의 예에 의하여 도목정都目政에 교대하여 임하게 했다.
세종 24년에는, 제생원濟生院을 혁파하여 침구전문생鍼灸專門生들을 혜민 제생원惠民濟生院에 분속分屬시키고, 매년 채용할 때에는 삼의사인三醫司人이 아울러 『침구경針灸經』을 시험하게 했다.
침구전문의제도가 완성된 것은 성종 대에 이르러서다. 성종 3년(1472), 성종은 의학권장醫學權裝 10조를 정하는 중에 침구전문의를 따로 설치할 것을 명하였다. 그리고 성종 16년(1485), 약 1세기에 걸쳐 완성한 조선 최고의 법전『경국대전』의 의과취재(의과고시 또는 의과시험에 관한 것)에 침구분야와 약제분야의 취재를 분리한다고 기록하면서 침구를 분리ㆍ독립할 것을 법으로 규정하기에 이르렀다.
전통의료가 전문과로 발전하여 약의藥醫와 침구의鍼灸醫로 전문화 되어 있었다는 것은 역사적 사실이다. 이러한 의료제도는 조선 말 근대의료기관이 처음 시작 될 때도 분명하게 나타난다.
구한말의 의료기관인 내부병원內部病院은 1899년(光武 3년)에 내부직할병원으로 설치되었다.

여기에는 일반 환자를 진료하는 외에 감옥 죄수들의 구료, 전염병 환자에 대한 피병원避病院 설치 등을 실행하였다. 이 내부병원의 직제는 주임급으로 병원장 1인과 기수技手 1인을 주고, 판임判任급 의사 15인 이하를 두기로 했다. 이들 의사 가운데 대방의大方醫 두 명과 종두의種痘醫 열명, 외과의外科醫 한명, 소아의小兒醫 한명 그리고 침의鍼醫 한명을 별도로 두고 있었다.
1900년(光武 4년)에 내부병원內部病院을 광제원廣濟院으로 개정한 뒤에도 본원의 직제에 의사 7인 가운데 대방의와 별도로 침의鍼醫 1인을 두고 있다.
이같이 침뜸의와 약의를 구분한 제도는 일제시대에도 마찬가지로 되어, 침구의鍼灸醫는 침구사鍼灸士로 약의는 의생醫生으로 하여 제도를 운영했다. 해방 후 국민의료법에는 침구를 ‘의료유사업’으로 하여 침사와 구사를 양성하는 것으로 하였고, 일제시대의 의생과 한약종상에 종사하는 약의를 한방의료를 담당하는 한의사로 하여 배출해 왔다. 한의사의 법통적인 맥은 약의藥醫인 것이다.


 


허준이 약과 침뜸을 동시에 하는 사람으로 알려져 있으나 이는 역사적 사실과는 완전히 다르다.

허준은 대의학자로서 주로 약으로 병을 치료한 어의였고, 침의鍼醫는 허임이라는 걸출한 의원이 또 있었다. 조선실록의 기록을 보자.
선조 37년. 밤에 선조에게 갑작스런 편두통이 발작한다. 입시한 의관 허준에게 선조가 묻는다.
“침을 맞는 것이 어떻겠는가?”
허준이 아뢴다.
“여러 차례 침을 맞는 것이 송구스럽기는 하지만, 증세가 긴급하니 상례에 구애받을 필요는 없습니다. 침의들은 항상 ‘반드시 침으로 열기熱氣를 해소시켜야 통증이 감소된다’고 말합니다. 소신은 침놓는 법을 알지 못합니다. 허임도 평소에 말하기를 ‘경맥을 이끌어낸 뒤에 아시혈(아픈 바로 그 자리)에 침을 놓을 수 있다’고 하는데, 이 말이 일리가 있는 것 같습니다.”
잠시 후 병풍이 쳐지고, 남영南嶸이 혈자리를 정하고 허임이 침을 놓는다.

한달 뒤, 대대적인 포상이 따른다. 어의 허준에게는 숙마 1필이 하사되고 허임과 남영은 6, 7품의 관원에서 당상관으로 파격 승진을 하게 된다.
여기서도 허준은 분명하게 ‘소신은 침을 모릅니다’라고 말하고 있듯이 침의와 약의는 구분이 되어 있었다.
이처럼 조선시대 침뜸전문과 약 전문이 구분되어 있었다.

그럼에도 오늘날 우리나라 한의사들의 집단이기주의 때문에 침을 모른다는 허준이 침놓는 사람으로 되고, 전문침의는 없었던 것처럼 하여 역사까지 왜곡되고 있는 것이다.

 



동북아지역 전통의약은 침구와 한약처방이 분리되어 전문과로 발전하여 왔다. 중국에서는 진秦나라 시대부터 구비되어 오던 의관제도醫官制度가 수당시대부터 완비되면서 침구는 전문과專門科로 정비되었다. 「침구사鍼灸師」를 두기 시작한 것이다. 의과의 대방맥과 소방맥과 등의 ‘방方’자는 중국어로 ‘약제처방’을 뜻하는 것으로 쓰이고, 침구처방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중국의학의 전문과 발전>
당(唐) => 원(元)


醫科



呪禁科

























당唐대에 침구과. 의과, 안마과, 주금과로 4개과 이던 것이 송宋대에는 9개과였다가 원元대의 분과는 13개과가 되었다.
부한 학자들이 침구의 과학적 효과를 입증하여 주었다. 그 결과 맥아더 정부는 침구금지 조치를 철회했다. 일본에서는 침뜸에 대한 현대의학적인 검증 노력이 꾸준히 이루어졌다. 의사들이 침구학을 배우는 것은 필수적이고 면허시험과목에 동양의학개론, 경락경혈학, 침구학 등의 과목이 필수적으로 포함되어 있다. 동시에 침구사들도 교육과정에서부터 현대의학에 대해 충분한 학습을 하도록 하여 침뜸을 현대적 의료에 활용할 수 있도록 한다.
고대 이후 침구술이 꽃피었던 한국, 중국, 일본에서 한결같이 침뜸을 약제처방과 분리하여 발전시켜온 것은 침구술 고유의 특성 때문이다. 침 몇 자루와 뜸쑥, 그리고 시술자만 있으면 환자를 돌볼 수 있는 침구술은 비용이 매우 저렴한 반면 효과는 대단히 탁월하다. 환자와 국민보건, 국가 재정에 있어서는 대단히 유익하고 더없이 경제적인 치료법이다. 반면 의술로 돈벌이를 하려는 사람에게는 침구술이 '힘이 들고 벌이는 얼마 안 되는 노동'으로 천덕꾸러기가 되기 십상이다.
더구나 오늘날 이윤추구를 우선시 하는 시장경제에서 하나의 독립된 전문의학인 침뜸의학을 한약처방에다 섞어버리면 노력에 비해 부가가치가 덜 생기는 침구의학은 치료수단에서 밀려나거나 한약판매의 보조수단으로 전락할 수밖에 없다.
침뜸을 발전시키기 위해서는 서민생활의술로서의 전통을 살려나가는 한편, 하나의 독립된 전문의료로 발전시켜나가면서 현대의술을 비롯한 다른 의술과 결합시키는 정책이 필수적이다.

- 이 글은 (사)허임기념사업회에서 발췌한 것입니다.( http://www.heoim.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