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동양 의학(침뜸)/침뜸 이야기

폄석과 침, 침구의 전통 - 구당 침뜸 이야기9

최정 / 모모 2011. 3. 7. 15:55

 

  폄석과 침
  폄석이란 석기시대의 치료 기구로 쓰던 돌의 자기(刺器)를 말한다. 중국 후한(後漢) 허신(許愼)의 『설문해자(說文解字)』에서는 "돌로써 병을  ()한다. "라고 하였다. 소문(素問)』의 이법(異法) 의론(宜論) 12 "그의 병은 개옹창(皆癰瘡)이다. 그를 치료하는 데는 폄석이 제일이다."라고 하였다. 고대에  종창(腫瘍)을 절개(切開)하는데  돌화살의 선단(先端)과 같이 뾰족한 석편(石片)을 사용하였던 것이 치료 기구로서 전승되었다고 생각된다. 전원기(全元起)의『소문(素問)』의 주() 속에서도 "고대에는 철()  루지 못하였기 때문에 돌을 침으로 하였다. "고 하였던 것이다.


  석기시대를 지나 철기(鐵器) 시대가 되면서부터 연금주술(鍊金鑄術)이 발달되어 금속으로 만들었으나 대부분이 대침(大鍼)으로 밖에 만들지 못하였다. 이때는 금침(金鍼),  은침(銀鍼), 동침(銅鍼), 철침(鐵鍼)으로 구분되어 있었으나 음양 오행(陰陽五行), 보사법(補瀉)으로 쓴다면 금침은 보하는데  쓰고, 은침은 사하는데  쓴다고 하였으며 동과  철제의 침은 보편적으로 썼다. 금은 황실에서만 쓰게 되어 있고, 일반 서민은 쓰지 못하였으므로 서민층에서는 동을 금과 같이 생각하였기 때문에  좋은 침을 말할때 동침이라고 하였다.


요즈음 사람들은 대침을 보면 동침이라고 하는데 이것은 잘못 알고 하는 말이다.

      * 근대  침체(鍼體)의 크기 (직경)
     중국  0.22 mm   0.28 mm
     한국  0.20 mm   0.35 mm
     일본  0.14 mm   0.34 mm 

      * 침의 길이
     중국 30 mm   120 mm
     한국 30 mm   1000 mm
     일본 30 mm   100 mm
  각국마다 이상의 것 이외에 특별히 크고 긴 것들도 있다.


   침의 재질(材質)
  , , , , 산뿌라치, 스텐레스 등이 있다. 최근에 가장 많이  쓰고 있는 것은 스텐레스와 은이다. 금속의 재질이강하고  연함에 따라서 찌르기  좋고 구부러지고 부러지고 찌를 때의 촉감 등에 미묘한 차이가 난다. 어떠한 재질의 침을 쓰느냐 하는 것은 시술자의 선호에 있지만 보편적으로 연한 자극을 원할 때는 금, 은이고 강한 자극을 하고자 한다면 동, , 스텐레스를 쓴다. 그런데  최근에는 사고 방지(쉬운 소독(消毒), 절침(絶鍼))를 위해 스텐레스 침이 대다수 쓰이고 있다.
      

 

    침구의 전통( 전통 의학의 2대지주 침구와 한약 )     
    고대 중국에서는 돌침을 썼다.
  중국의 전설에 의하면 지금으로부터  3천년 전에 중국의  황제 신농(神農)이 처음으로 약초를 이용하였다고 한다. 신농은 "자신의 백초를 맛보아 70번이나 죽을 뻔 하였다." 고 그 후 의방을 시작하였다고 전하고 있다. 이것이 전통 의학의 시작이라고 한다중국에 있어서 약물의 원전은 "신농본초경(神農本草經)"이라고 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도 약은 신농이 시작한 것을 알 수 있다


  그에 반하여 침구는 기원이 명확하지 않다. 일설에 의하면 침의 원형은 한국이나 인도에서 전하여져 왔다고도 한다. 여하튼 그 연대는 3천년을 넘는 것이 확실하다고대 중국에서 최초의 침은 가느다란 작은 돌을 연마한 것 같다. 지금 남아 있는 고서(古書)에는 이것을 "폄석( )"이라고 하였고, "과거에는 돌을 침이라 하고, 아픔을 고치
는 것은 이것이다. "라고도 기술되어 있다. 이들 침 "폄석"은 중국의 12능 발굴 조사에서도 실제로 발견되어 고대의 침이었다는 것이 확인되고 있다.
  중국에서는 " 약석의 효(藥石之效) 없다. "고 하는 말이 있으나 약석이란  한방에서 침과 약을 가리켜 말하는 것이다. 약도 먹었고  침 치료도 하였지만 안타깝게도 낫지 않을 "약석의 효 없다."라고 하는  것이다. 이러한 말에서도 고대에 침은  돌이었다는 것이 충분히 추측되는 것이다
    
   삼대 의서가 중국 의학의 기초를 만든다.
  전설의 시대를 내려와 진한(秦漢)시대에 동양 의학의 이론 체계가 거의 확립되어 침구 의술도 대성되었다. 지금으로부터 2천 수백년 전의 일이다.
  중국 의학의 고전적 의서 "황제내경(皇帝內經)"이 나온 것도 이 때일 것이다.  이 책은 "소문(素問)" "영추(靈樞)" 2부로 이루어져  "소문"에는 병리와 의학 이론에  대하여 "영추"에는 해부와 침술에 대하여  기술되어 있다. 침의 이론과  실천법은 이 때에 거의 정리되었다고 할 것이다.
  후한 시대에 들어서 "상한잡병론(傷寒雜病論)"이 씌어졌다. 이것은 약물요법의  체계를 말한 의서이나 우리 나라 의학계에도 "상한론(傷寒論)"으로서  대단히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
  고대 중국의 의학은 이 "황제내경"  "신농본초경" "상한잡병론" 3대 의서를  축으로 각개의 계통으로 발전하여진 것이다.

 

  中西合作運動의 新展開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의 성립 후에도 유소기 일파의 서양 의학 존중 일변도로 중점은 도시에 있어서 농촌의 의료 사업은 조금도 발전되지 않았다그러나 문화 혁명을 시작한 이래 이점이 날카롭게 비판되어서 모택동의 "의료 위생 활동은 농촌에 중점을 둔다."라는 지시 하에서 몇몇 큰 병원을 오지(奧地)의 성()으로 옮기고 또 도시의 의사가 농촌 순회 의료에 진출하여 농촌의 의료 위생 조건은  급속히 개정되었다.
  동시에 문화 혁명 후는 중국 의학의 가치를 높이 평가하여 침구 의학이 약진되어 중국 의학과 서양 의학과의 결합(중서 합작)이 행하여졌다. 이것은 독자의 발전을 하여  온 침구 의학을 서양 의학에 맞추어 간 것이 아니고 서로 좋은 점을 찾아 맞추어 새로운 의학을 발전시키려고 한 것이다


  이와 같은 중서 합작에 의하여 보기 좋은 꽃을 피우게 된 것이 세계적으로  유명한 침마취이다. 합작이 없었다면 침구 의학의 실천만으로, 또 서양 의학의  이론만으로 침마취라고 하는 새로운 마취는 탄생치 못하였을 것이다.  동서 의학의 좋은 점을 잘 찾아냈기 때문에 이와 같은 신발견이 이루어진 것이다.
  지금 중국에서는 여러 가지 모양으로 중서 합작이 진행되고 있다. 의학 교육에 있어서도 대학에서의 교육 기간 중에 서양 의학을 배우는 학생은 동양 의학의 대학에서 1년간, 동양 의학을 배우는 학생은 서양 의학의 대학에서 1년간 각기 그의 이론과  실천을 배우는 것이 의무로 되어 있다.
  실제 치료에 있어서는 중서의 양 의자(醫者)가 함께 진단하고 서의(西醫)의 치료로  것인가, 중의(中醫)의 침뜸 치료로 할 것인가, 아니면 중서 합작으로 할 것인가 환자에게 가장 알맞는 치료 방법을 검토하여 행하고 있다.
  긴 역사 속에서 유유히 육성되어 온 중국의 의학은 서양 의학이라고 하는 새로운 숨을 쉬어서 수십 년 사이에 현저히 발전을 해  온 것이다. 이론면에서 추구하는 서양 의학과 실천면에서 추구하는 침구 의학이 결합한 새로운 의학은 반드시 새로운 발견을 산출하였음에 틀림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