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귀농 준비 시절/예비 농부의 농사 배우기(2011년)

장맛비에 순식간에 바뀐 고추밭의 운명

최정 / 모모 2011. 8. 8. 15:29

 

2011년 7월 19일 화요일, 처음 꽈리 고추를 따기 시작했다.

장마가 한차례 지난 뒤에 이미 오이맛 고추는 전멸했다.

그나마 살아 남은 것은 꽈리와 청량인데 이것들 마저 시름시름 말라 죽기 시작한다.

살아 남은 고추를 따야 하는데 다른 일에 밀려 이미 늦은 상태이다.

장마 후에 전국적으로 고추밭이 망가졌다고 들었다.

물량이 매우 부족하다고 하니 일부 살아남은 고추를 따기로 했다.

 

꽈리 고추는 꼭지가 매우 연해서 매우 조심스럽게 따야한다.

고추는 꼭지가 부러지면 상품 가치가 없단다.

그리고 구부러지고 모양이 나쁜 것도 상품 가치가 없단다.

적당한 크게에다가 보기에 예쁜 것들만 모아 출하를 해야 한다고 한다.

우리 고추밭의 꽈리는 이미 너무 커져서 사실 상품 가치가 없는 것들이다.

그런데 이번에 워낙 물량이 부족하다 보니 크기에 상관없이 출하가 가능하게 된 것이다.

양은 보잘 것 없었지만 그래도 일부나마 건진 것이 다행이랄까?

 

시간이 갈수록 고추는 점점 죽어갔다.

청량도 한 번 따고는 거의 전멸했고 그나마 꽈리 고추만 멸 줄 살아 남아있는 상태이다.

그래도 이곳은 다른 지역보다 집중호우의 양이 상대적으로 적었고

기후도 서늘해서 우리밭 말고 다른 농장의 고추밭들은 멀쩡했다.

약을 많이 친 집들의 고추밭은 살아 남았다.

'오체 아빠'는 그동안 고추밭에 약을 친 적이 없단다. 그래도 잘 컸으니까.

그런데 올해는 노지에 심은 것들은 거의 전멸했다. 비 탓이다.

하우스에 심은 것들은 멀쩡하다.

이러니 기후 변화의 영향을 덜 받는 시설농을 할 수 밖에 없나보다.

 

 

7월 18일 월요일. 맑고 더움. 비로 죽은 오이맛 고추를 뽑아 냈다.

 

땀을 흘리며 오이맛 고추를 다시 심었으나 이것도 며칠 후에 다 죽었다.

 

7월 19일 화요일. 가랑비가 오락가락했지만 이날 처음 꽈리 고추를 조금 땄다.

 

혼자 앉아 고추를 따다 보면 똑똑 꼭지 끊어지는 소리가 경쾌하게 들린다.

바람 소리, 똑똑 소리, 잎을 스치는 소리, 새소리...

따가운 햇살만 아니라면 명상에 빠졌을 텐데...

 

 

7월 20일 수요일. 가을 바람처럼 찬 바람이 불어온 날. 고추를 따는 '밍밍 엄마'

 

비 때문에 시간이 없어 첫수확이 늦어진 청량 고추. 너무 커버렸다.

 

7월 31일 일요일. 비에 젖은 꽈리 고추를 땄다.

 

7월 31일 일요일. 휴가에서 돌아온 '최복토' 양이 몇 줄 살아남은 꽈리 고추를 따고 있다.

 

8월 1일 월요일. 흐리고 비. 어제 딴 꽈리 고추의 물기를 일일이 닦았다.

 

 

이삼일 후면 금방 고추가 또 자라있다. 시기에 늦지 않게 따주어야 하니 할 수 없이 땄다.

꽈리는 어른 새끼손가락만 해야 상품 가치가 있다는데 우리 농장 것은 가운데손가락 크기를 넘어서곤 했다.

겨우 3박스 넘게 땄지만 문제는 물기를 일일이 닦아내야 했다. 아, 엄청 오래 걸렸다.

마른 수건으로 일일이 살살 닦아내는 것은 따는 시간보다 훨씬 많이 걸린다.

 

구부러진 것과 상한 것, 때가 낀 것들을 다 골라내서 담아야 한다.

구부러진 것은 왜 뺄까? 누구의 문제일까?

모양이 일정하지 않고 구부러지기도 하고 크거나 작거나 말거나

아무튼 여문 것들은 먹는 데에는 지장이 전혀 없다.

이런 다양한 모양새는 모두 땅과 기후의 영향을 고스란히 받아 여문 것들이다.

그런데 우리는 너무 예쁘고 보기 좋고 일정한 크기에만 익숙해져 있다.

마트의 유기농 매장에 갔을 때 의심을 했던 기억이 있다.

하나 같이 모양도 일정했고 벌레 흔적도 없고 일반농과 거의 차이가 없어 보여서

진짜 유기농인가 의심을 했는데 현장에 와 보니 많은 것을 알게 된다.

소비자가 원하지 않는다고 중간 유통 상인은 매우 까다롭게 상품을 선별해 간다고 한다.

특히 일반 마트나 백화점 유기농 매장은 그런 게 더 심한 것 같다.

나머지는 폐기 처분 된다.

소비자의 인식을 바꾸어야 하는가?

모양이 좀 빠지는 것을 모아 좀 싸게 팔면 안 되나?

이것도 자본의 논리에 밀린다.

같은 가격이면 다홍치마라니 소비자의 입장에서는 좋아 보이는 것을 찾을 수 밖에...

너무 보기 좋은 것들만 먹어서 우리의 몸은 진정 건강해 졌는가?

 

물론 노지에서 키우지 않고 하우스 같은 시설을 이용하면

훨씬 더 일정하고 품질이 좋은 것들을 생산할 수 있다.

그러나 진짜 먹을거리는 노지에서 이슬, 바람, 비, 햇빛을 직접 받으며

화약비료와 농약 없이 자연 자체에서 길러진 것이어야 한다.

이것이 인간을 살리고, 땅을 재생시키는 길인데...

고추의 물기를 닦으면서,

고추가 매우 비싼 현재 상황에서도 상품성이 없는 것들을 골라 내면서

아, 머리 아픈 생각들을 했다.

못생긴 것은 인간이나 먹을거리나 차별을 받아야 하다니, 쩝...

 

우리 농장 식구들은 구부러진 꽈리 고추를 모아 멸치랑 실컷 볶아 먹었다.

그리고 하우스 고추밭에서 못생긴 오이맛 고추를 매일 따다가 먹는다.

좋은 것들만 우리가 먹는 셈인가?

이제 남은 꽈리도 얼마나 버티어 줄 지 의문이다.

올해 노지 고추 농사는 확실히 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