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 밑에 있는 집. 뒤에는 비탈밭이 있고 앞에는 가파르게 내려간 밭이 있다. 그리고 산.
우리가 길을 나선 김에 꼭 들려야 할 곳이 바로 경북 봉화군이었다.
이곳으로 한 달 전에 귀농을 한 '태님'네 가족을 보기 위해서였다.
전북에서 트럭을 타고 위로 위로 달려 경북에 닿았다.
네비게이션을 쓰지 않는 '오체 아빠'는 몇 년 된 낡은 지도책에 의지해 웬만한 곳은
다 찾아가곤 했는데, 아, 그런데 이번 장소는 만만하지 않았다.
우리가 봉화군에 진입했을 때는 이미 날이 어두워졌기 때문이다.
시골길은 보이는 게 없다.
다섯 시간을 쉬지도 않고 달려온 터라 지칠만도 했지만 목적지가 코앞이라 계속 달렸다.
문제는 지도에 표시된 시골길이 옛길이었던 것.
전화로 안내를 받은 길은 최근에 잘 뚫린 새길을 기준으로 한 것이었고
우리가 지도를 통해 더듬어 간 곳은 산으로 접어드는 꼬불꼬불 위태로운 옛길이었다.
더구나 마을을 지나도 겨우 집에서 나오는 불빛만 띄엄띄엄 있어서
도대체 어디가 어딘지 구분할 수가 없었다.
결국 주변에서 빙빙 돌다가 아무 집이나 들어가 묻고 물어서 겨우 목적지에 도착했다.
네비게이션만 있다면 얼마나 간단하게 찾았을까? 하고 잠시 아쉬웠지만
덕분에 트럭 한 대로 어둠 속의 미로를 찾아 헤매는 경험을 했다.
우리에게는 어짜피 시간이 남아 도는 농한기였으니까.
집 뒤에서 내려다본 풍경. 그리고 집 뒤의 밭
우리의 도착을 기다리며 정성껏 저녁 밥상을 준비한 '태님'은 무척 걱정하며 기다리고 있으셨다.
근처이니 금방 도착한다는 전화도 이미 몇 통이나 받았건만
예상 도착 시간보다 한 시간이 넘었으니 찌개를 몇 번이나 다시 데웠다고...
깜깜할 때 도착해서 그런지 어디가 어딘지
여기서 얼마나 깊은 산골인지 도대체 짐작이 되지 않았다.
아침에 일어나 주변을 산책해 봤다.
정말 듣던 대로 집이 딱 한 채. 이웃집이 아예 없다.
가파르고 구불거리는 길을 따라 500미터 이상은 내려가야 마을이 나온다.
이 마을은 꽤 너른 골짜기에 사과밭이 많았고 무엇보다 축사가 많았다.
논도 제법 있으니까 40여 가구 정도 살 수 있는 마을 규모를 이루었나 보다.
마을의 집들은 양지바른 곳의 비탈을 따라 옹기종기 모여 있는 형태였다.
아무튼 '태님'의 집은 홀로 한적한 곳에 있었다.
이 집은 지어진 지 그리 오래되지 않은 새집이나 마찬가지였다.
전에 아이들과 2년 정도 산 가족이 확장해서 지었다고 하는데
내부 시설 하나하나 도시적 편리함에 뒤떨어지지 않게 애쓴 흔적이 역력하다.
그래서 '태님'은 귀농했는데 집이 너무 호사스럽다고 불만이시다.
'태님'은 이보다 더 깊은 골짜기에 들어가 순전히 자급자족으로 살 수 있는가를 경험해 보고 싶어했다.
전에 살던 이 집의 가족들은 좀더 평지로 이사를 했다고 한다.
'태님'도 이곳에서 살아보고 평지로 가게 될 지, 더 깊은 골짜기로 들어갈 지 모르겠다고...
도시에서 태어난 두 딸은 다행히 이곳을 재미있어 했다.
여전히 이쁘고 밝게 웃었다. 열 살, 여섯 살.
자기 딸들이 나중에 커서 그냥 농사를 짓고 살았으면 좋겠다고 전에 '태님'이 한 말이 기억났다.
자식의 교육에 목을 메는 요즘 같은 세상에,
더구나 귀농을 해도 자식의 교육만은 도시적인 시스템을 못버리는 귀농자들이 대부분인데...
이 집은 TV도 인테넷도 없다. 굳이 연결한 의지가 없으시다.
내 손으로 땅을 일구어서 먹고 살아 보겠다는 엄마 밑에서 자라나는
두 딸들의 미래는 어떻게 펼쳐지게 될까.
밭을 둘러보고 내려가는 길 어떨결에 주인을 따라 귀농견이 된 '똘이'
도시에서 텃밭, 바느질, 침뜸 등 자급자족을 위한 준비를 꽤 오래 하셨나 보다.
그래도 막상 귀농은 순식간에 이루어졌다.
추석 연휴에 남편분과 밭과 집을 둘러 보고 당장, 즉흥적으로 계약을 해버린 것이다.
아 근데, 한 가지 아쉬움은 집 뒤의 산그늘이 참 길다는 거.
해가 뜨고 한참이 되어서야 집에 볕이 든다.
귀농 새내기 값을 톡톡하게 치른 것 같다고 말씀하신다.
길고 추운 겨울이 걱정되었다.
다행인 것은 화목 보일러였는데 방이 매우 따뜻했다.
10월말에 이곳으로 이사를 했는데 이것저것 정리하느라 계속 분주했다고 한다.
그 와중에 밀 파종도 해서 싹이 제법 올라와 있었다.
남편분은 서울에서 직장을 다니니 주말을 이용해 먼 길을 오신다고 한다.
산골로 귀농을 원하는 아내의 가치관을 존중하기 위해 휴직을 생각하고 있으니
참으로 이해심이 지극한 남편분이라 하겠다.
귀농할 때 얻어온 고양이 중 수컷. 자태가 예뻐서 암컷인 줄 알았다.
겨울을 날 장작더미 옆에 있는 암컷. 멋는 줄무늬 때문에 수컷인 줄 알았다.
'오체 아빠'는 집 주변과 밭을 꼼꼼하게 둘러 보신다.
장보러 가기도 힘든 것을 고려해서 농장의 채소를 챙겨다 주시는 것도 있지 않더니
'태님'에게 필요한 조언을 해주셨을 것이다.
판매를 위한 농사가 아니라, 가족의 먹을거리를 생산하기 위한 농사.
텃밭 경험은 있지만 직접 넓은 밭에 경작을 해보지 않은 새내기이니
내년 농사는 좌우충돌, 어찌될런지 알 수가 없다.
편한 길을 두고 굳이 험한 길을 골라 가는 사람이 있다.
'태님'도 그런 분 중의 한 분이신 것 같다.
두 딸과 함께 하는 '태님'네 가족의 내년 농사가 사뭇 궁금해진다.
아무튼 덕분에 나는 드디어 봉화에 처음 발을 디뎌 보았다.
산골이라는 얘기는 전부터 들어 왔지만
눈으로 보니 정말 경치가 뛰어난 골짜기 마을들이 아주 많았다.
서울에서 거리가 있고 교통편이 불편한 이유 때문인지
이곳은 자본의 오염도가 확실히 낮아 보였다.
강원도는 온통 펜션에, 별장에... 도시 관광객과 자본이 점령했는데...
강원도 산골의 산세가 치열하면서도 위엄과 장엄함이 있다면
이곳의 산세는 깊지만 나름 부드러운 맛이 있었다.
오랫동안 이곳의 매력을 잊지 못할 것이다.
청량산 주변을 감고 흐르는 골짜기의 투명한 물빛을 오래 기억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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