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귀농 준비 시절/귀농의 고수를 찾아서

귀농의 고수를 찾아서9 - 농사짓는 교수님, 수녀님

최정 / 모모 2011. 12. 7. 12:32

 

               

해발 500미터의 깊은 산골, 3개월 전에 완성되었다는 교수님 댁

 

 

               

              집 아래로는 가파른 길이 빙 길게 돌아 나간다.                                        임신 중이라는 '멍순이'

 

 

               

                '멍순이'는 아주 순한데 수컷인줄 알았다.                                     한쪽 방은 온돌이라 아궁이가 있었다.

 

 

봉화군 상운면에서 재산면으로 가는 길에 청량산 도립공원을 지나가게 되었다.

입산을 못하는 아쉬움이 컸지만 스쳐지나가는 경치만으로도 만족스러웠다.

재산면에 '태님'네 가족이 알고 지내는 귀농한 교수님이 있다기에 찾아가 보기로 한 것이다.

 

구불구불 이어진 가파른 산길을 넘었지만 도무지 마을이 있을 것 같지 않았다.

작은 버스 정류장이 서 있는 곳에서 마을로 이어지는 길을 만났다.

언덕을 넘어가면서 이런 곳에 마을이 있을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산에 가려진 마을이 깊은 골짜기에 숨어 있었다.

띄엄띄엄 집들이 10여 채 펼쳐진 마을.

그 집들을 지나 더 가파른 길을 돌아 올라서니 제일 높은 곳에 집이 한 채 나타났다.

 

이곳은 완변한 절터였다.

교수님과 '멍순이'만 살고 있다.

3년 정도 작은 컨테이너에서 살면서 농사도 지으면서 지금의 집을 지은 것이라고 들었다.

집 주변에 보이는 비탈밭들과 집을 소유하고 있으시니 자금이 준비된 귀농인 셈이다.

마른 체격에 턱수염도 기르신 교수님은 인문학적인 인상을 풍겼다.

도시를 오가며 이곳에 홀로 정착지를 마련한 속내를 물어보지는 못했다.

도시공학, 도시설계를 했다는 교수님이 깊은 산골로 은둔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이렇게 기막힌 터를 찾아낸 비법이 부럽기도 궁금하기도 했다.

이런 마을과 이런 자리를 찾는 것은 외지인으로서는 힘들겠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냥 우연히 이곳 땅을 사게 됐다는 얘기만 들었다.

워낙 가파르게 이어진 길을 올라와서 그런지

겨울에 큰 눈이라도 오면 곤란하겠다는 생각은 떨쳐버릴 수가 없었다.

더구나 해발 500미터가 넘는 높이였다.

그렇지만 교수님 댁의 위치가 너무 마음에 들었다.

그야말로 산 속 깊은 곳에서 저절로 고요해질 수 밖에 없는 자리였다.

 

'멍순이'가 임신을 해서 온갖 맛있는 것을 먹이며 오늘낼하며 출산을 기다리고 있는데

예상한 날이 지나도 새끼를 낳지 않는다고 했다.

우리가 아무래도 상상 임신 같다고 했다.

젖은 커졌지만 배가 그다지 불러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멍순이' 때문에 겨울에 도시로 나갈 일을 미루고 있으신 거 같은데

하하, 두고볼 일이다.

시골에 오면 집마다 개들이 있어서 그 개들을 보는 재미도 쏠쏠하다.

 

교수님의 안내로 겨우 하나 있는 먼거리 식당에 가서 점심을 얻어 먹고

'태님'네 가족과 교수님의 안내로 근처에 있다는 농사짓는 수녀님을 찾아가 보기로 했다.

전부터 알고 지내며 가끔 방문했던 곳이라 한다.

 

 

               

             수녀님이 홀로 쌓은 장작더미, 예술 작품이다.                                       수녀님이 기거하는 산골집

 

 

 

수녀님이라지만 홀로 농사지으며 수행을 한다는 사실 자체가 나의 흥미를 끌기에 충분했다.

교수님 댁에 갈 때보다 더 높고 깊은 산골로 들어서는 느낌이었다.

한참 가파른 길을 확 올라서니 갑자기 예기치 않은 곳에

비닐하우스들이 확 펼쳐져 있는 마을이었다.

해발 600미터의 산골 마을인데 비닐하우스에서는 주로 수박 농사를 한다고 했다.

후작으로는 토마토 농사.

 

환하게 웃으며 우리를 맞이한 수녀님은 젊은 분이었다.

더구나 삭발한 머리에 회색빛 작업복 바지를 입고 있어 여승이 아닌가 했다.

가까이에서 보니 눈빛이 참 맑았다.

산중에 살만하시다고 생각했다.

 

수녀님 댁 앞에 닿았을 때 제일 먼저 눈에 띈 것은 가지런하게 쌓아올린 장작더미였다.

그렇게 차곡차곡 높이 쌓아올리는 일이 쉽지 않았을텐데...

몇 번 무너지고 동네 어르신의 조언을 받아 혼자 쌓아올린 것이라고 한다.

장작더미, 이 모습이 나에게는 오래 기억에 남았다.

장작더미 그 자체가 이미 삶의 모습이었기 때문이었다.

 

집 주변 정리가 얼마나 정갈한지 수도자가 사는 집 답다는 생각을 했다.

시멘트로 된 부엌 바닥은 얼마나 깔끔한지 맨발로 다녀도 될 것 같았다.

부엌 바닥 보다 낮은 위치에 역시 아궁이가 있었다.

무 잎을 말려놓은 모습도, 무를 써는 자세도, 물건 정리도 엄격한 질서가 베어 있었다.

저절로 조심스러워지거나 단정해져야 할 것 같았다.

 

어떤 신부님이 철저하게 자연을 통해 수행을 하고자 하는 공동체를 만드신 거라고 한다.

비움 공동체인데, 깊은 산골 여기저기에 수녀님들이 때로는 홀로, 둘, 셋이 모여

유기농 농사를 지으며 자급자족하며 수행을 하고 있다고 들었다.

 

 

 

               

                       무차를 만들기 위한 무썰기 도전                                          2시간쯤 지나서야 이만큼 썰었다.

 

 

마침 수녀님은 무차를 만들기 위한 무 썰기에 바쁜 나날을 보내던 차였다.

우리가 가서 일손을 돕기로 한 것이다.

대대로 장수하는 집안이 있어 신부님이 자세히 관찰해 보니 별다른 특이한 점이 없더란다.

그런데 단 하나, 그 집안에서는 생소하기 그지없는 무차를 일상적으로 먹더라는 것이다.

그래 그 집에서 무차 만드는 방법을 배워 공동체에서도 무차를 만들기 시작했다고 한다.

 

곰팡이 나지 않게 무를 잘 말리려면 그 길이와 굵기가 아주 중요하다고 했다.

길이 3센티, 두께 0.5센티.

수녀님이 시범을 보이고 샘플을 만들어 보였다.

절대 빨리 썰려고 하면 안 된다.

아주 차근차근, 천천히 썰어야 이 길이와 두께를 계속 유지할 수 있다.

더구나 썰고 남은 자투리, 뿌리 같은 것도 버리지 않고 따로 활용하고 있었다.

아주 작은 자투리도 절대 버리지 않는다.

 

이 무썰기는 절대 쉽지 않은 일이었다.

무 썰기 자체가 수행 그 자체였다. 성미 급한 사람도 시도하지 못할 일이다.

나는 수녀님의 샘플을 자로 삼아 무에 대고 3센티로 잘라내는 1단계 작업을 했다.

일정한 두께로 채를 써는 것은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교수님과 내가 1단계 작업을,

'태님', '밍밍 엄마', '오체 아빠'가 0.5센티로 써는 2단계 작업을 했다.

건조용 컨테이너 안에서는 무 써는 소리만 났다.

엄청난 집중력을 요구하는 작업이었다.

간혹 썰어 놓은 무 굵기가 좀 굵어지면 수녀님이 다시 굵기를 상기시켜 주곤 했다.

하나같이 일정한 길이와 두께로 무는 썰어졌다.

 

간간이 대화를 하면서 무를 써는 수행이 이어졌다.

이런 식으로 썬다면 정말 종일 썰어 봐야 얼마 못 썬다.

벌써 며칠째 수녀님은 무만 썰고 있으신듯 하다.

직접 농사진 무를 이런 식으로 썰어서 자연건조를 시킨 무라면

그 차가 몸에 이로울 수 밖에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드디어 다 썰었다.                                                        장독대 옆의 개 이름은 '산'이

 

 

무슨 일이 하든 손이 여럿이면 금방이다. 무 한 바구니를 드디어 다 썰었다.

날이 흐린 관계로 건조기에서 1차로 건조시켜야 한다고 했다.

혼자 하면 며칠을 해야 하는 일인데 고맙다고

수녀님은 야채전, 과일, 차 등을 내오셨다.

아, 야채전의 채썰기 굵기 또한 얼마나 정갈한지..., 맛이 일품이었다.

말린 국화를 넣어봤다는 무차도 마셔 보았다.

이곳은 분명 속세인데, 분명 뭔가 다른 느낌이 있었다.

 

수녀님은 농사가 없는 겨울에는 지친 몸도 추스리고

밀린 공부도 한다고 했다.

하루 일과의 시작도 정리도 수행의 연속인 것 같았다.

허약한 몸으로 태어나 농사일을 하려니 체력 관리에 신경을 무척 쓰시는 것 같았다.

자연에서 모든 것을 얻는 것에 대한 감사함을 말하며

자연에 순응하며 사는 것 자체가 최고의 수행임을 몸소 실천하고 있는 것이다.

수녀님의 환하게 웃는 모습이 참 맑게 느껴졌다.

이 시끌벅적한 세상 속에도 이렇게 고요한 곳이 있었다.

내 삶의 방식은 고요와 시끌벅적함이 섞인 정신없는 것일 테지만

수녀님을 만나고 돌아서는 길은 마음이 이상하게 따뜻해졌다. 편안해졌다.

 

해질녘에 우리는 수녀님 댁을 떠났다.

나만 급히 서울행 버스를 타고 나머지 일행들은 교수님 댁에서 신세를 졌나 보다.

동서울 터미널에 내리는 순간 그동안 잊고 있던 피로가 몰려왔다.

지하철에서 본 사람들이 왜 그렇게 낯설었을까?

흙 한 점 묻지 않은, 이제 막 새로 산 것 같은 신발을 신고

핸드폰 스크린에 집중해 있는 사람들

세련된 가방들, 화장한 얼굴, 너무나 새것인 옷들...

흙투성이가 된 내 등산화를 내려다보며 나는 마음이 무거워졌다.

편리한 것들은 참 좋은데 이상하게 사람을 공허하게 만든다.

한강의 화려한 야경을 보며

'저 불빛이 나는 슬프다.  저 불빛이 나는 슬프다...'

이렇게 자꾸만 되뇌여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