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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 근 '반가사유'

최정 / 모모 2012. 2. 28. 11:01

반가사유

 

 

 

                                     류 근

 

 

 

 

다시 연애하게 되면 그땐

술집 여자하고나 눈 맞아야지

함석 간판 아래 쪼그려 앉아

빗물로 동그라미 그리는 여자와

어디로도 함부로 팔려 가지 않는 여자와

애인 생겨도 전화번호 바꾸지 않는 여자와

나이롱 커튼 같은 헝겊으로 원피스 차려입은 여자와

외항선 타고 밀항한 남자 따위 기다리지 않는 여자와

가끔은 목욕 바구니 들고 조조 영화 보러 가는 여자와

비 오는 날 가면 문 닫아걸고

밤새 말없이 술 마셔주는 여자와

유행가라곤 심수봉밖에 모르는 여자와

취해도 울지 않는 여자와

왜냐고 묻지 않는 여자와

아,

다시 연애하게 되면 그땐

저문 술집 여자하고나 눈 맞아야지

사랑 같은 거 믿지 않는 여자와

그러나 꽃이 피면 꽃 피었다고

낮술 마시는 여자와

독하게 눈 맞아서

저물도록 몸 버려야지

돌아오지 말아야지

 

 

 

 

 

 

류근, 『상처적 체질(문학과지성사, 2010) 중에서

 

 

* 작가 소개 : 류 근 - 경북 문경에서 태어나 충북 청주에서 자랐으며, 중앙대학교 문예창작학과와 같은 과 대학원을 졸업했다. 1992년 문화일보 신춘문예에 시가 당선되어 문단에 나왔으나 이후 공식적인 작품 발표는 하지 않았다.

 

* 책소개(출판사) - 1992년 문화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하였으나, 이후 한 편의 작품도 발표하지 않았던 시인 류근이 18년의 침묵을 깨고 펴낸 첫 시집. 세상에 한 번도 그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시 70편을 통해 독자들에게 새로운 두근거림을 전해준다. 그의 시를 읽는 일은 슬픔과 상처를 들여다보는 일과 같다. 쓸쓸한 영혼들의 상처는 타자에 의해 가감될 수 없는 고유한 것이므로 철저히 단독자의 형식이지만, 체질이 비슷한 우리는, 타인의 상처에서 나의 상처를 보게 된다.
 미학적·사회적 귀환을 공식화한 『상처적 체질』은 처량하게 용도 폐기한 ‘감상’이 오히려 힘이었고 앞으로도 그럴 수 있음을 고지하는 역설적 텍스트이다. 류근은 ‘감상’의 힘을 대중의 감각에 의지한 통속미와, 비극과 희극의 기우뚱한 균형 속에서 인간사의 본질을 통찰하는 희비극에서 발견한 듯싶다. 그의 시 세계를 낭만적 경향으로 흐르게 하는, 충만보다는 상실과 결락, 별리로 가득 찬 기억의 성질과 그에 따른 애수와 그리움을 ‘누구나’ 경험했을 법한 공동의 통속미로 심화하는 진정한 힘을 만끽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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