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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창작 모임 <뻘>에 대한 기억1

최정 / 모모 2010. 12. 3. 22:33

시창작 모임 <뻘>에 대한 기억1

 

 대학 시절에는 초고만 쓰면 누군가에게 보여 주고 싶어서 절친한 벗에게 편지를 쓰거나 후배들에게 시 읽기를 강요하곤 했다. 익지 않은 풋과일의 떫은맛을, 도저히 숨겨지지 않았던 감정의 과잉을 여기저기 흘리고 다녔으니 지금 생각하면 후회스럽기까지 하다.

 

 그 당시 시에 대한 끈적끈적한 경험을 하게 해준 곳은 시창작 모임이었다. 국어국문학과 시창작 모임이었던 <뻘>에 대한 기억을 떠올려 본다. 시간의 줄기를 거슬러 먼 곳으로 가야한다. 기억이 뒤죽박죽이다.

 

 이 시절 <뻘>은 내 시를 가차 없이 평가하고 해체하며 나를 성장시켜 주었다. 시를 쓰겠다고 쓸데없이 진지함에 빠져 지내기도 했지만, 가장 순수했던 시절이었을 것이다. 당시 국문과에는 시반, 소설반, 문학비평반, 어학반, 사회과학반 하는 식으로 과학생회 내에 학회(학예술회)가 있었다. 나는 고리타분한 강의실보다는 각종 학회 모임에 더 관심이 많았다. 처음부터 시를 쓰겠다는 생각은 없었다. 화창한 봄날 시반에서 개최한 시 발표회에서 시를 낭송하는 모습에 부러움을 느꼈을 뿐이다.

 

 사실, 조금씩 접해가는 사회 현실의 모순과 내가 누구인지 찾아가는 과정에서 뭔가 분출구를 만들고 싶었을 것이다. 그래서 어느 날 어이없게도 시를 쓰고 싶다는 생각이 강렬해졌다. 대학 1학년 늦여름부터 ‘시반’(이후 <뻘>로 개칭)에 들어갔는데, 사람들은 전혀 낭만적이지 않았다. 교과서에서 배워왔던 시도 아니었다. 자신과 사회, 나아가 이 세계에 대한 나름의 진지한 성찰을 하고 있었다. 이 때 난 정제된 언어로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기에는 미숙했다. 그럴만한 인내심도 없었다. 몸으로 부딪치고 경험을 하며 내가 누구인지, 내 꿈은 무엇인지 찾는 것이 급했다.

 

 어떻게 살 것인가와 문학이란 무엇인가라는 추상적인 고민을 핑계로 시간은 늘 잘 흘러갔다. 마음을 잡고 시를 본격적으로 써야겠다고 생각한 것은 4학년 때였던 것 같다. 취업 준비로 바쁜 학년이라지만, 나는 뒤늦게야 시를 제대로 쓰고 싶어졌던 것이다.

 

 누군가는 대학생들의 시 쓰는 모임이 낭만적이고 치기어린 시절에 한번 해볼만 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아니면 인생의 낭비라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그럴지도 모른다. 이 어마어마한 최첨단 자본주의 사회에서 살아남아야 하는데, 한가하게 문학한답시고 시간을 낭비할 수 있겠는가.

 

 대학 1학년 시절 잊을 수 없는 기억으로는, 지금은 고인이 된 김남주 시인의 초청 강연회를 들은 일이다. 생전의 김남주 시인과 직접 담소를 나누었던 기억은 아직 생생하다.

 “무기로서의 시”라는 강연이 끝난 후, 문과대 앞 잔디밭에서 김남주 시인과의 대화 시간이 있었다. 오랜 복역을 끝낸 후 몇 년이 지난 시점이었지만, 차가운 독방에서 빈 우유 곽을 펴서 몰래 시를 새기던 시인의 이야기를 직접 들을 수 있었다. 군사 독재의 감방은 양심수들에게 종이와 펜을 허용하지 않았던 것이다. 폭압적인 군사 독재 아래서 시가 어떤 무기였는지 난 그 당시 전혀 알지 못했다. 그렇게 칼날 같은 시가 있어 그 어느 이론서보다도 더 잘 군사 독재를 해부할 수 있다는 것도 몰랐다. 그날 이후, 김남주 시인의 시를 닥치는 대로 읽었다. 알고 보니 감히 흉내 낼 수도 없는 혁명가이자 시인이었다. 가난한 자들의 붓이 되고자 한 시인이었다.

 

 그러나 사실, 이 시절의 주체할 수 없는 젊음은 늘 ‘오오, 그리운 생각들이란 얼마나 죽음의 편에 서 있는가’(기형도의 <10월>,『입 속의 검은 잎』중에서)에 가까이 있었다. 이유 없이 우울한 날씨가 편안한 옷처럼 느껴지던 나이였다. 현실의 모습은 열리지 않는 자물쇠처럼 답답하게만 느껴졌다.

 

 <뻘>은 1주일에 한번 씩 모여 창작시 세미나를 했다. 1주일에 적어도 1편은 쓰라는 얘기다. 그리고 책도 한 권 읽어가야 했다. 문학 이론 세미나도 했으니까. 그러나 우리들은 너무 바빴다. 선후배 간 술자리도 많았고, 강의도 있었고, 과제물도, 토론회도, 그리고 놀 일도 많았다.

 

 나름 괜찮게 썼다고 생각하고 시를 냈다가 절망하곤 했다. 시평을 다 듣고 나면 알게 된다. 자신의 시가 얼마나 형편없는지를, 당장 쓰레기통에 던져 버려야 한다는 것을. 이것을 견디고 또 쓰고 또 써야 하는데……. 간혹 세미나에서의 논쟁이 뒤풀이 술자리까지 이어져 크고 작은 다툼도 있었다. 마치 시가 세상의 전부인양 살던 시절이었다.

 

 시를 쉽게 생각하고 시작했다가 포기하는 사람이 더 많았다. <뻘>을 거쳐 간 많은 선후배들이 있었으나 끝까지 밀고 나가는 사람은 늘 소수였다. 그냥 쉽고 소박하게 시에 접근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우리들은 전문적으로 쓰고 싶어 했다. 그러나 생각해 보라. 무수한 시인들이 있지만 좋은 시와 뛰어난 시인으로 인정받는 사람은 얼마나 되는지.

가장 큰 어려움은 치열한 고민을 통해 시인의 눈으로 세상을 볼 수 있느냐의 문제였다. 또 하나의 현실적인 어려움은 시는 돈이 되지 못했다. 졸업 후 먹고 사는 데에 도움이 되지 못했다. 그러니 끝까지 밀고 나가는 사람이 얼마나 되겠는가.

 

 아무튼 교과서의 시인만 알던 나는 <뻘>을 통해 동시대의 많은 시인을 알게 되었다. 우선 선배들 입에서 거론되는 시인의 이름을 기억했다가 읽어 나가기 시작했다. 도대체 무슨 내용인지 알 수 없는 시들도 그냥 읽었다. 그러다 보니 시를 보는 눈이 조금씩 생기기 시작했다.

 

 나는 부지런히 시를 쓰는 축이 아니었다. 다작多作하는 사람이 늘 부러웠다. 일기를 쓰고, 더 많은 편지들을 쓰고, 과 학회실에 비치된 일명 ‘국문일지’라는 낙서노트에 많은 감정의 찌꺼기를 노출시켰지만 몇 줄로 압축하는 재주가 늘 부족했다.

 

 건질 만한 글도 없었지만 3학년 때 우연히 나의 시작詩作 노트를 분실했다. 일기장을 잃어버린 것보다 상실감이 더 컸다. 많은 초고들과 메모들이 사라졌다. 휴학 기간을 비롯해 3년 넘게 고민한 시 메모들이 그 속에 있었다. 이를 이유로 더 못 썼지만 다행히 4학년 때부터는 수첩과 노트를 통해 약간의 기록들이 남아 있다. 그래서 새삼 4학년 때 <뻘>벗들과 한 달 동안 30권의 시집 읽기 내기를 했다는 사실도 알 수 있었다. 아무도 성공하진 못했지만 매일 시를 읽으며 지낸 한 달이었을 것이다.

 

 시는 소통 방법의 하나였기에 <뻘>은 다른 사람들과 시를 공유하고 함께 고민하는 시간을 갖고자 했다. 이를 위해 ‘시 발표회’를 통해 낭송하는 행사도 했고, 대자보에 시를 써서 복도 벽에 전시하는 ‘벽시전’도 했다. 그래서 봄과 가을은 <뻘>에게 바쁜 행사의 달이 되곤 했다.

 

 우리는 ‘벽시전’과 ‘시 발표회’가 작품 소통에는 너무 단편적이라는 것을 파악하고, 1년 동안의 창작품을 정리하는 의미에서 본격적으로 작품집을 만들기 시작했다. 이는 무척 중요한 작업이었다. 겨울 방학 내내 준비하여 봄에 발간했다. 졸업 선배들에도 시를 청탁했다. 나는 아직 <뻘>에서 발간한 작품집을 모두 갖고 있다. 지금 보면 참 초라하고 질도 떨어지고 시도 별 볼일 없지만 그 한 권, 한 권이 당시에는 최고라고 생각했고 우리들이 스스로 만든 시집이었기에 참 뿌듯했다.

 

<뻘>이 발간한 작품집 목록

제1집 『울대』

제2집 『담』

제3집 『외박』

제4집 『낮술』

제5집 『목어』

제6집 『농도 100퍼센트』

제7집 『그는 좁은 방에서 무엇을 했을까』

제8집 『길엔 바닥이 없네』

제9집 『환절기』

 

 그러나 안타깝게도 과 개념이 사라지고 학부제로 개편되면서 후배들은 신입생 모집에 애를 먹었다. 시를 쓰고자 하는 신입생들도 적었지만 국문과만의 모임이었기에, 학부제 시행으로 기존에 명맥을 유지하던 국문과 내의 모임들이 위태로워질 수밖에 없었다. 이래저래 20여 년간 시를 써 왔던 <뻘>의 역사가 단절되었다. 하지만 누군가 시를 쓰고자 하는 사람이 있다면 언제고 다시 부활할 것이다.

 

 연약한 시를 쓰는 것보다 온몸으로 시처럼 사는 삶이여야 한다고 열변을 토하는 선배도 있었고, 밑바닥까지 가봐야 치열한 시를 쓸 수 있다는 선배도 있었다. 온몸으로 시 같은 삶을 살 것인가, 시를 쓰는 삶을 살 것인가 갈팡질팡하며 우유부단한 젊음이 지나가 버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게 시마저 없었다면 그 길고 긴 터널을, 용광로처럼 끓어오르던 젊음을 무사히 통과하지 못했을 것이다.

 

 

 * 2007년 10월에 정리해 보았던 글을 다소 수정하여 올렸습니다. 이어진 이야기는  시창작 모임 <뻘>에 대한 기억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