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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창작 모임 <뻘>에 대한 기억2

최정 / 모모 2010. 12. 3. 22:47

 

 시창작 모임 <뻘>에 대한 기억2

 

 문학 기행

 <뻘>에서 진지하게 시 창작 세미나만 했다면 재미없었을 것이다. 우리는 시 얘기보다는 인생에 대한 고민을 더 많이 나누었고, 늘 세미나보다 더 길어지는 뒤풀이가 있었다. 또한 때마다 MT나 야유회를 갔다. 이 때, <뻘>에서 꼭 하던 일은 백일장이었다. 시제詩題가 정해지면 주어진 시간 내에 모두 한 편씩의 시를 창작해야 했다.

 

 우리들은 드디어 MT나 야유회보다 더 긴 여행을 생각해 냈다. 일명 문학 기행! 문학 기행은 시인의 고향을 직접 찾아가 시의 배경을 온몸으로 느끼는 것은 물론, 역사적인 문학 현장을 답사하는 일이었다. 우리들만의 국토순례를 만든 것이다. 이때 평생 잊지 못할 여행을 하게 되었다.

 

 ♦ 1996년 남도 문학 기행

 전라남북도는 예부터 이름난 예술가들이 부지기수로 많이 태어난 곳이다. 곳곳의 땅을 밟아 보고서야 알았다. 남도의 땅이 예술가들을 만들어 냈다는 것을. 나도 충청도 시골에서 자랐지만 남도 시인들의 붉은 흙의 강렬한 이미지에는 좀처럼 공감하지 못했다. 내가 본 흙은 갈색에 가까웠기 때문이다. 그런데 남도의 흙을 보니 정말 붉었다. 그것도 아주 시뻘겋게 붉었다. 또한 대나무 숲을 보니 농민들이 든 죽창의 이미지도 선명해졌다.

 

 하루하루가 가슴 뛰는 여행길이었다. 8월말 방학 기간을 이용해서 12명이 일주일 동안 다녀왔다. 가기 전에 김영랑, 김남주, 황지우, 고정희, 김준태, 김용택 등의 남도 출신 시인들의 시집을 읽고 세미나도 하며 열심히 준비했다.

계획 자체가 빡빡한 일정이었다. 돈은 항상 더 부족해서 늘 허기졌다. 그렇지만 끊임없이 웃고 떠들고 노래하고 이동했다.

 

 열차를 타고 달려 8월 24일 새벽 5:30에 광주역에 도착했다. 아직 해가 뜨기 전이라 우리들은 그냥 목적지인 망월동을 향해 걸었다. 한 시간을 걸었을 쯤 어둠이 걷히기 시작했고 시내버스를 탈 수 있었다.

 망월동 묘역에 도착했을 때, 우리들은 약속이나 한 듯이 침묵 속에서 5․18 묘역을 거닐었다. 거대한 역사 앞에서 나는 너무 작고 부끄러워 할 말을 잃었다. 생전에 뵈었던 김남주 시인의 묘 앞에서 우리들은 묵념을 했다.

 “김남주 선생님, 저희는 <뻘>이라는 모임에서 시를 쓰는 놈들입니다.”  모임 대표가 이 말을 했을 뿐인데, 울컥하고 목이 메었다. 첫 문학 기행의 출발을 이곳, 망월동에서 한 것이다.

 

 밤을 새우며 내려와 망월동을 들려 무등산을 등반한 우리들을 김준태 시인은 너무 반갑게 맞아 주셨다. 『참깨를 털면서』를 비롯해서 대단한 시를 쓰신 분이 아닌가. 그러나 저녁 늦게 광주 일보에 도착한 우리들은 너무 지쳐 있어서, 4시간에 걸친 열정적 말씀에도 불구하고 어찌나 민망스럽게 졸았는지 지금 생각해도 죄송스럽다. 그렇지만 시인은 일일이 사인을 해서 당신의 시집과 산문집을 한 권씩 우리 모두에게 선물로 주셨다. 멀리서 젊은 학생들이 자신을 찾아와 주었다고 도리어 기뻐 하셨다.

 

 김준태 시인은 『아아 광주여, 영원한 청춘의 도시여』에서, 서슬 퍼런 군부 독재를 향해 광주항쟁 문제를 직접 꺼내들어 모진 고초를 겪기도 하셨다. 온몸으로 시를 쓰고 온몸으로 사셨던 것이다. 밤 11시가 다 되어 시인은 우리들을 근처에 있던 광주 종합터미널 어느 분식집으로 이끄셨다. 민주화 운동으로 동생을 잃은 분이 운영하는 곳이었다. 그곳에서 야식을 먹으며 뒤풀이를 했다. 새벽녘 인적도 끊긴 그곳에서 모두 일어나 어깨를 걸고 시인의 선창으로 함께 불렀던 ‘광야에서’를 어찌 잊을 수 있겠는가. 우리는 빛고을 광주를 몸으로 느끼고 있었던 것이다.

 

 8월 26일, 우리는 전북 임실군 덕치면에서 김용택 시인을 만났다.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섬진강』으로 널리 알려진 김용택 시인을 직접 만나게 될 줄은 몰랐다. 시인의 고향이면서 시의 배경이 된 섬진강을 따라가다 보니 덕치 초등학교가 나왔다. 너른 들에 솟아난 큰 산 아래 있었다. 전교생이 53명이 전부인 작은 분교였다. 한 폭의 그림 같은 곳이었다. 이 그림 속의 작은 교실에서 우리들은 시인과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렇게 섬세하고 투명한 시를 쓰신 분이 투박한 첫 인사말을 건넬 때, 우리들은 깜짝 놀랐다. 그 먼데서 이곳까지 왔냐는 아주 무뚝뚝하게 들리는 사투리였는데, 나중에야 이것이 소박하고 정 깊은 인사말이라는 것을 알았다. 섬진강가에 있는 고향을 한 번도 떠난 적이 없다고 했다. 도시로 행렬을 지어 나가는 시대에, 시인은 고향을 지키면서 시를 통해 고향을 재탄생시키고 있었다. 시인의 <섬진강1>은 여러 번 읽어도 자꾸 읽고 싶어지는 시이다.

 

 가문 섬진강을 따라가며 보라 / 퍼가도 퍼가도 전라도 실핏줄 같은 / 개울물들이 끊기지 않고 모여 흐르며 / 해 저물면 저무는 강변에 / 쌀밥 같은 토끼풀꽃, / 숯불 같은 자운영꽃 머리에 이어주며 / 지도에도 없는 동네 강변 / 식물도감에도 없는 풀에 / 어둠을 끌어다 죽이며 / 그을린 이마 훤하게 / 꽃등도 달아준다 (후략)

 

 시인은 아이들을 참 좋아하셨다. 일부러 늘 작은 분교로만 다니며 근무를 하는 것 같았다. 아이들에게서 오히려 많은 것을 배우고 있다고, 또한 김수영과 신경림 시인을 존경한다고 했다. 이때 찍은 사진을 보면 섬진강변에 모여 앉은 작은 마을들과 강가의 구부러진 길들이 떠오른다. 우리들은 가지고 간 시집에 열심히 사인도 받아왔다. 나는 김용택 시인을 직접 보기 전부터 이미 그의 시에 푹 빠져 있었다. 이 만남이 더 큰 의미가 되어 시집만 나오면 당장 사서 읽어보는 1등 독자가 되었다.

 

 이 외에도 김영랑 생가生家, 다산초당, 백련사白蓮寺, 땅끝 마을 전망대 등 극기 훈련에 가까운 모든 답사 일정이 끝나가고 있었다. 계획했던 여정은 더 많았지만 드물게 다니는 시골의 버스를 기다리고, 걷고 하다 보니 시간이 많이 걸렸다. 날마다 남도의 사투리에 푹 젖었다.

 

 우리는 마지막으로 휴식을 취하고 여행을 총정리하기 위해 땅끝 마을 근처의 바닷가로 갔다. 해질녘 비린내가 그득한 생선 트럭을 얻어 타고 간 송호리 해수욕장. 그 곳의 작은 민박집에서 마지막 밤을 지새우고 인천으로 돌아왔다. 일주일 만에 돌아왔는데 문학 기행의 설렘이 가라앉지 않아 한동안 답답한 강의실에서는 잘 집중할 수가 없었다.

 

 이 문학 기행을 통해 나는 국토를 직접 순례하는 매력에 푹 빠졌다. 그래서 졸업 후에는 유홍준의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1, 2, 3권을 들고 틈만 나면 답사를 가고 싶어 했다. 이 책에 나오는 곳을 모두 다니겠다는 야심찬 계획을 세우고 몇 년 동안 시간 날 때마다 돌아 다녔다. 지금은 중단되었지만 대중교통만을 이용해서 반 정도는 다녀왔다.

 아무튼 이 첫 번째 문학기행의 성공으로 <뻘>은 여름 방학마다 문학 기행을 떠나게 되었다.

 

 ♦ 1997년 경상도 문학 기행

 후배들은 이미 며칠 전에 경상도로 내려갔으니 팔공산 등반도 하고 나태주 시인도 만났을 것이다. 나는 안 선배와 금요일 밤기차를 타고 8월 30일 새벽 부산에 도착했다. 태종대를 둘러보고 부산에서 배를 타고 거제도로 건너갔다. 후배들도 일정대로 거제도로 이동하는 있는 중이었다. 이때는 전 지역에서 수신이 가능한 삐삐가 등장한 때여서 우여곡절 끝에 경남 통영에서 후배들을 만나게 되었다.

 

 우리는 통영의 남망산 공원에 올라갔다. 낮은 산에 위치한 공원이라서 한려수도의 절경이 시원하게 들어왔다. 이순신 장군의 역사적 전투 현장이었던 만큼 이곳에는 이순신 장군의 동상과 시비詩碑가 세워져 있었다. 머나먼 과거가 가깝게 느껴졌다. 이 아름다운 바다에서 목숨을 던져 피비린내 나는 전투를 치렀다니. 현장에서 느끼는 조국의 역사가 남다르게 다가왔다.

 

 그러나 무엇보다 우리가 열심히 찾아낸 것은 청마靑馬 유치환 시인의 시비詩碑였다. 담배 파이프 모양의 비석에는 ‘기ㅅ발’이란 시가 새겨져 있었다. 거제도는 대단히 아름다운 섬이었다. 버스에서 바라다 보이는 바다와 마을 풍경이 피로감을 금방 잊게 해 주었다. 또한 가는 곳마다 들리는 경상도 사투리가 우리의 귀를 즐겁게 해 주었다.

 

 우리는 곧바로 유치환 시인의 생가生家를 찾아 나섰다. 무더운 한낮의 시골길을 이리저리 헤매고 걷고 하다가 묻고 물어서 시인의 생가를 찾았을 때는 너무나 기뻤다. 거제도 둔덕면 방하리에 있는 이 집에는 시인의 8촌쯤 되는 친척 할머님이 한 분 살고 계셨다.

 더구나 가까이에 묘소가 있다하여 산길을 찾아 시인의 묘소까지 갈 수 있었다. 대학 입학시험 준비로 접해야 했던 시였고 일제 시대를 살았던 시인이었기에 멀게 만 느껴졌었는데 이번 기회로 특별해진 것이다. 묘소는 잘 정돈되어 있었고, 특이하게도 시인은 어머니와 나란히 누워 계셨다. 옆에는 <사모곡思母曲>이 새겨진 시비詩碑도 있었다.

 

 거제도에 왔으니 역사적인 현장인 거제 포로수용소를 방문해 보자고도 했으나 이미 해는 지고 있었다. 우리들의 유일한 통신망이었던 삐삐에 의지해 윤 후배가 간신히 밤늦게 거제도까지 찾아 왔다. 그 큰 섬에서 하마터면 미아가 될 뻔했으니, 개인 휴대폰이 당연한 지금으로서는 웃음만 나온다. 하긴 첫 문학 기행에서는 잠깐 후배 한 명을 잃어버렸는데, 그때는 삐삐조차 없었으니 우리들은 그야말로 전라도 강진 읍내를 발로 뛰며 찾아야 했었다.

 

 이 날은 거제도에서 모래가 가장 곱다는 구조라 해수욕장에서 민박을 얻었다. 후배들이 계속 8월말로 문학 기행을 가게 된 것은 휴가철이 지난 시기라서 민박집 숙박비가 매우 쌌기 때문이다. 특히 해수욕장은 더욱 한산하고 조용했다. 민박집 옆이 바로 바다였다. 고운 모래에 누워보니 별들이 쏟아져 내렸다. 드넓은 남해의 한 섬에 누워있는 것이다. 끊임없이 잔잔한 파도 소리가 들려오기까지 하니 쉽게 잠을 이룰 수 없는 밤이었다.

 

 ♦ 1998년 충청도 문학 기행

 중간에 소식을 들으니 후배들은 계룡산에서 큰 비를 만나 무척 고생했다고 했다. 첫 문학 기행을 무등산으로 시작해서 그런지 후배들은 계속 문학 기행마다 유명한 산을 여정에 넣고 있었다. 나는 역시 주말을 이용해 강 선배와 충남 홍성으로 후배들을 만나러 갔다.

 

 마침 그곳에서 ‘만해卍海 문학제’가 열리고 있었다. 완벽한 연애 시로도 손색이 없음은 물론, 일제시대 꺼져가는 조국에서 희망을 노래한 만해 한용운. <님의 침묵>을 비롯해 우리는 이미 교과서에서 만난 한용운 시에 얼마나 친숙해 있었던가. 다음날 홍성군 결성면 성곡리에 있는 한용운의 생가生家를 찾아 갔다. 너무 밋밋하게 복원되어 있어 실망스러웠다. 하긴 일찍 속세를 떠난 스님의 몸이었으니 무엇이 남아 있겠는가. 그나마 바로 옆에는 시인의 위패와 영정을 모신 만해사卍海祠라는 사당이 있었다. 이때는 유일하게 박 후배의 휴대폰이 있었기에 길을 잃을 염려가 없었다. 대신 타지에서 서로 상봉하는 스릴감은 없긴 했다.

 

 ♦ 1999년 경기도 문학 기행

 유난히 장마가 길게 이어지고 있었는데 후배들이 문학 기행 마무리 장소로 경기도 연천군 한탄강에 간다고 해서 별로 내키지 않았다. 휴전선이 가까운 곳이라 답답하게 느껴졌을 것이다. 안 가겠다고 했다가 강 선배만 보내는 것이 못내 불안해 같이 합류하게 되었다.

 

 이미 연천에는 많은 비가 온 뒤였다. 처음에는 후배들이 무슨 계곡인가를 간다고 했는데 비가 그치지 않아 위험하다고 판단해서 그나마 한탄강 유원지로 바꾼 것이다. 그 비를 뚫고 한탄강 옆에 민박집을 잡았다. 비는 종일 그치지 않았고 사람들도 거의 없었다.

 

 우리들은 할 수 없이 방안에 모여 앉아 백일장을 열었다. 삽겹살을 구워 놓고 이날 쓴 시에 대한 긴 토론이 이어졌다. 거센 빗줄기가 걱정되어 나는 가끔 강가에 나가 살펴보고 들어왔다. 한탄강은 폭이 좁고 가파르게 굽이치고 있었는데 한참 아래에 물이 흘러가고 있어 안심이 되었다. 시 이야기에 몰두해 있다가 밤중에 다시 나가보니 강물이 넘치기 직전이었다.

 

 내가 들어와 위험하다고 얘기했지만 다들 아직 실감을 못하고 있었다. 더구나 민박집 주인도 안심을 시키며 3년 전에 큰 홍수가 나서 민박집을 더 높은 위치에 지은 것이라며 위급하면 얘기해 주겠다고 했다. 사실 이미 유원지 내에는 주민들에게 대피하라는 안내 방송이 계속 나오고 있었다. 급기야 강물이 넘쳐 민박집 마당에 물이 차오르기 시작했고 경찰차 한 대가 와서 우리들에게 급히 대피하라고 했다.

 

 아주 잠깐 사이였다. 부랴부랴 중요한 짐만 급히 챙겨 나오는데, “어어” 하는 사이에 경찰 아저씨가 내린 빈 차가 물에 떠내려가고 있었다. 덜컥 겁이 나기 시작했다. 민박집 아저씨가 봉고차를 대면서 타고 나가자고 했다. 그러나 그럴 잠깐의 여유도 없이 물이 더 올라왔다. 봉고차를 뒤편 도로에 세울 테니 밭을 타고 올라가라고 했다.

 봉고차는 떠내려가는 위험을 무릅쓰고 급히 출발했고 우리는 퍼붓는 장대비를 맞으며 캄캄한 언덕배기 밭을 기었다. 도로까지의 그 짧은 거리가 아득하게 느껴졌다. 물은 아주 순식간에 불어나고 있었다. 이미 우리가 가진 모든 휴대폰은 불통이었다. 아무에게도 구조를 요청할 수 없다. 더욱 겁이 났다. 이렇게 죽을 수도 있구나. 이곳에서 죽으면 얼마나 어이없는 일인가. 폭우에도 아랑곳없이 시 얘기를 하다가 탈출을 못하게 되는 것이다. 처음 느끼는 야릇한 공포감이 밀려왔다.

 

 다행히 우리는 탈출에 성공했고 근방에 있던 권 후배 친척집에 찾아 들어서서야 안도의 한숨을 쉴 수 있었다. 생생하게 경험한 공포가 남아 쉽게 잠들 수가 없었다. 아침 6시 뉴스를 보니 우리가 머물던 민박집은 겨우 지붕의 형체만 남고 물에 몽땅 잠겨 있었다. 서둘러 돌아오는 길도 쉽지 만은 않았다. 철로가 망가져 표도 팔지 않았다. 그나마 버스가 다닌다기에 돌아올 수 있었는데 온통 물에 잠긴 마을들을 보면서 지나야 했고 도로도 곳곳에 물이 흘러 조마조마했다. 집으로 돌아오고서도 사흘 내내 비가 내렸다. 나는 사흘 내내 절대 외출하지 않았다. 우리는 이 문학 기행에서 중요한 교훈을 얻었다.

 

  2000년에는 강원도, 2001년에는 서울 지역, 2002년에는 다시 경상도로 문학 기행이 이어졌다고 들었다. 나는 서울 지역 답사에만 잠깐 참여했다. 바쁜 직장 생활에 본격적으로 매달리기 시작했던 것이다. 끝내 제주도까지 가지 못하고 <뻘>의 문학 기행도 멈추었다.

 

 문학 기행이 멈추었듯이 이때 나의 글쓰기도 같이 멈추었다. 글보다는 현실이 절박했다. 소설보다 극적인 현실에서 어느덧 위태롭게 외줄타기를 하는 평범한 직장인이 되어 있었다. 지루하다가도 시간은 훌쩍 건너 뛰어 있곤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