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창작시 - 최정/용현동 시절 시(1997-99)

소나무

최정 / 모모 2010. 12. 5. 12:27

 

소나무


 


                               최 정


 


 


 


아랫배가 싸하게 아프기 시작했어요


엄마는 말했어요


진짜 여자가 된거여


니도 이제 고생길 훤 한거여


좌르르 쏟아지는 검붉은 피


산다는 게 불길하게 느껴졌어요


빨랫줄에 다섯 딸 달거리 광목천 펄럭였던 집


아들 얻자고 마흔에 날 낳았다죠


폐경기 엄마가 사준 생리대가 저주의 증표 같았어요


종일 눈보라가 몰아쳤어요


까닭 모를 열에 들떠 뒷산에 올랐어요


늘 끼고 다니던 스케치북에 소나무를 그렸지요


이상한 날이었어요


아랫배는 자꾸 싸하게 가라앉고 하얀 광목천이 펄럭였죠


눈사람이 되도록 앉아서 소나무를 그리고 있었던 거예요


아마 무서워서 울고 있었을 거예요


열세 살 겨울이었어요


그날 이후 엄마 삶을 조금씩 훔쳐보기 시작했어요


가족에게 제 살 다 파주는 엄마가 미웠지요


눈 쌓인 소나무 한 그루가 엄마였다는 걸 모른 채


 


 


 


 



≪내 피는 불순하다≫(우리글, 2008)에 수록됨

'# 창작시 - 최정 > 용현동 시절 시(1997-99)' 카테고리의 다른 글

진달래 필 무렵  (0) 2010.12.05
보문사  (0) 2010.12.05
속초를 지나며  (0) 2010.12.05
콩나물 대가리  (0) 2010.12.05
역마살  (0) 2010.12.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