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나무
최 정
아랫배가 싸하게 아프기 시작했어요
엄마는 말했어요
진짜 여자가 된거여
니도 이제 고생길 훤 한거여
좌르르 쏟아지는 검붉은 피
산다는 게 불길하게 느껴졌어요
빨랫줄에 다섯 딸 달거리 광목천 펄럭였던 집
아들 얻자고 마흔에 날 낳았다죠
폐경기 엄마가 사준 생리대가 저주의 증표 같았어요
종일 눈보라가 몰아쳤어요
까닭 모를 열에 들떠 뒷산에 올랐어요
늘 끼고 다니던 스케치북에 소나무를 그렸지요
이상한 날이었어요
아랫배는 자꾸 싸하게 가라앉고 하얀 광목천이 펄럭였죠
눈사람이 되도록 앉아서 소나무를 그리고 있었던 거예요
아마 무서워서 울고 있었을 거예요
열세 살 겨울이었어요
그날 이후 엄마 삶을 조금씩 훔쳐보기 시작했어요
가족에게 제 살 다 파주는 엄마가 미웠지요
눈 쌓인 소나무 한 그루가 엄마였다는 걸 모른 채
≪내 피는 불순하다≫(우리글, 2008)에 수록됨
'# 창작시 - 최정 > 용현동 시절 시(1997-99)' 카테고리의 다른 글
진달래 필 무렵 (0) | 2010.12.05 |
---|---|
보문사 (0) | 2010.12.05 |
속초를 지나며 (0) | 2010.12.05 |
콩나물 대가리 (0) | 2010.12.05 |
역마살 (0) | 2010.12.0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