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 읽기/좋은시 읽기

황규관 '우회하는 길'

최정 / 모모 2011. 3. 5. 14:25

우회하는 길

 

 

                                 황규관

 

 

 

이 길이 우회하는 길이다.

부딪혀 흘려야 할 피를 피한다고 욕하지 마라

강물을 따라가는 길

산모퉁이를 돌아가는 길이다

풍경을 훔치려는 허튼 욕망을

끝내 버리지 못한다 해도

가마득한 벼랑을 옆구리에 끼고도는 길이다

힘차게 휘어지는 물살이

어지러워 말을 빼앗기는 길이다

곧장 가며 흘릴 수 있는 피의 색깔을

잠깐 꽃에게 물어보는 길이다

이 길이 우회하는 길이다

조금 늦게 도착하는 길이다

아니 영영 떠도는 길

혼자되는 길

심장이 뜨거워지는, 괴로운 길이다.

 

 

 

 

황규관, 《패배는 나의 힘》(창비, 2007) 중에서

 

* 출판사 소개 - 굴욕과 패배를 온몸으로 통과하는 길, 낮은 목소리로 우회하는 길!
 1993년 전태일문학상에 시 「지리산에서」 외 9편이 당선되면서 작품활동을 시작한 황규관 시인의 『패배는 나의 힘』이 출간됐다. 『철산동 우체국』(1998) 『물을 제 길을 간다』(2000)를 낸 지 7년 만에 펴내는 세번째 시집으로 시인은 고단한 삶, 그 일상이 곧 사랑과 싸움의 마당임을 구체적인 체험에 뿌리박은 시적 혜안으로 들려준다.
 구로공단에서 시를 쓰기 시작한 시인은 낮에는 일을 하고 밤에는 구로노동자문학회 사무실에서 모여 문인의 꿈을 키우고, 또한 전국노동자문학연대 행사와 ‘공장문학의 밤’ 등 늘 거리에서 다양한 활동을 하면서 문학적 자양분을 섭취했다. 그의 현실인식과 시적 편력은 낙관과 이상과 진보라는 허울 좋은 말들 앞에서 정신을 잃지 않으려고 펜을 똑바로 쥐는 것이었다. 제도, 계몽, 합리보다 탈주, 내면의 열림, 어둠을 벗 삼아 활달하게 자신의 삶의 진실을 꿰뚫어보기 위해 노력한 흔적이 이 시집에서 주목해야 할 부분이다. 진실을 보고 그것을 펼쳐 삶의 일부가 되게 하는 일은 늘 성공과 실패로 얼룩져 있다. 시인은 이 얼룩을 읽어주는 것이 가장 정직한 자기고백이라는 사실을 보여준다.

 이제 시인은 시 쓰기가 곧 노동하기라는 단순한 등식에 안주하지 못한다. 자신의 뜻으로 어찌할 수 없는 현실이 코앞에 있고, 때때로 찾아드는 그 좌절과 무력함을 슬기롭게 극복해야 할, 십자가를 진 자로서의 책무가 있기 때문이다. 자신의 어둠을 응시하고 그것을 노래하는 일로 현재의 시공간을 채색하는 것에는 이러한 배경이 숨어 있다. 이것이 변두리의 삶, 주변부의 길을 걷는 사람으로서 우리의 남루하고 비루한 삶을 노래하는 의미이기도 하다. “나의 이력서는 허름하고 영혼마저 누추하기 그지 없”음을 자각하고 “남루가 빚어낸 왜곡”(‘시인의 말’)을 담아 시를 이룩하는 것, 그것이 어떤 당대적 의미를 담은 노래가 될 것인가? 이 물음을 자각하듯 반복적으로, 새롭게 던지는 일, 이것이 황규관이 버릴 수 없는 시적 화두이다. 이것이 일하는 사람이자 시 쓰는 사람으로서 겪어야 하는 이중의 고통이자 곱절의 축복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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