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 읽기/좋은시 읽기

천양희 '그자는 시인이다'

최정 / 모모 2011. 4. 22. 16:50

그자는 시인이다

 

 

                                            천양희

 

 

 

그는 일생을 쓰면서 탕진했다 탕진도 힘이었다

그 힘으로 피의 문장을 썼다

 

불꽃 삼키고도 매운 연기 내는

굴뚝의 문장

시뻘건 꽃 피우다 모가지께 툭, 떨어지는

동백의 문장

모천회귀하려다가 불귀의 객이 되는

연어의 문장

 

문장을 들고

두려움과 슬픔을 이기기 위해

쓰고 쓰고 또 쓰는 지독한 짓

문장이란 낭비의 극점에서 완성되는가

말은 뿔처럼 단단해지고

불안은 소리처럼 멀리 퍼진다

 

뒤져보면 두려움이 슬픔보다 더 두꺼웠다

슬픔은 말하자면 비자금 같은 것인데

슬픔을 저축해둘 걸 그랬어 아이들 듣는데

그런 소리 마라 아이가 자라면 죄도 자라는 것이니

피붙이란 본질적으로 슬픈 것이지

 

도대체 이놈의 문장은 구속을 담배에 불붙이듯 한다

담배에 불붙이며 중얼거린다

 

죄를 병처럼 끙끙 앓는 그의 몸은 세찬 바람이다

바람소리에는 운명이 들어 있다 아니 미래의 미지가 들어 있다

 

어떻든 간에 그자는 시인이다

 

 

 

 

 

천양희의 《나는 가끔 우두커니가 된다》(창비, 2011) 중에서

 

 

* 저자 소개 - 천양희 : 1942년 부산에서 7남매 중 막내로 태어나 대가족 속에서 자랐다. 이화여대 국문과를 졸업하였으며, 초등학교 때 선생님의 한마디에 시인이 되려는 꿈을 꾸었다. 그리고 1965년 박두진 시인의 추천으로 〈현대문학〉을 통해 그 꿈을 이루었다. 소월시문학상, 현대문학상, 박두진문학상, 공초문학상, 대한민국문화예술상(문학 부문) 등을 수상했으며 지은 책으로는 시집 『마음의 수수밭』『오래된 골목』『너무 많은 입』 등과 산문집으로 『직소포에 들다』『시의 숲을 거닐다』『내일을 사는 마음에게』 등이 있다.

 

* 책소개(출판사) - 진솔한 시어와 서정적 울림으로 문단과 독자들의 오랜 사랑을 받아온 천양희 시인의 일곱번째 시집. 6년 만에 펴낸 이번 신작시집에서 시인은 삶과 시에 대한 오랜 고민들을 털어놓는다. 때로는 고통스럽게 때로는 달관한 듯 담담하게 이어지는 시인의 문법에는 기나긴 불면의 밤과 사색의 시간을 거친 단단한 언어가 담겨 있다. 이번 시집의 언어에 머무른 시인의 손길에는 삶과 사람과 자연에 대한 진심어린 애정이 고스란히 묻어 있다. 더욱더 깊어진 시선으로 생을 바라보는 시인의 입김은 그 어느 때보다 따뜻하다.
천양희의 시는 섣부른 기교나 화려한 채색을 담지 않는다. 그는 늘 사물과 자연의 정수(精髓)를 향해 돌진하며, 이를 정성스럽게 고아내 아름다운 시로 길러낸다. 이를 두고 문학평론가 이숭원은 “그의 시는 철저하게 단련된 지적 고뇌의 소산이다. 그런 점에서 그는 김소월보다 윤동주에 가깝고, 서정주보다는 김수영에 가깝다.”라고 말한 바 있다. 허위가 난무하는 이 시대에 분명 그의 시는 진실성 있는 파장과 묵직한 울림을 선사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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