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귀농 준비 시절/예비 농부의 농사 배우기(2011년)

내가 제일 잘 나가, 내가 제일 잘 터져!

최정 / 모모 2011. 9. 13. 11:42

두어 달 동안 비가 오고 아니면 흐려서 햇볕을 제대로 보지 못한

하우스의 고추나무들은 제대로 자라지 못하고 있었다.

노지의 고추밭(청량과 꽈리 고추밭)이 전멸했으니 하우스 고추밭이라도 잘 건사해야 할텐데 말이다.

 

다른 일에 밀려 고추나무가 일부 쓰러지고 나서야 뒤늦게 고추끈을 묶어 주었다.

영 크지 않을 것 같지 않았던 풋고추들이 어느덧 부쩍 자라 있었다.

자란 정도가 아니라, 따낼 시기가 지나 있었다.

 

조합 사무실 차가 들어오는 날이 월, 수, 금이고

고추는 저장고가 아니라 실온 상태로 출하를 하기 때문에 최소 전 날이나 당일에 따야 했다.

8월 중순이 가까워져서야 본격적인 풋고추 따기가 시작되었다.

 

오이맛 고추는 워낙 크고 굵기 때문에 따기가 쉽다.

오이만큼 크고 씹을 때 아삭아삭 연하게 씹히기 때문에 일명 아삭이 고추로 알려져 있다.

처음에는 어떤 것을 따야 하는지 선별해 내는 안목을 길러야 했다.

망설이는 시간이 길어지고 꼭지나 고추가지가 부러질까 매우 조심스러웠다.

그러나 우리가 딸 때는 시기가 지나 너무 익어서 끝부분에 갈라지는 무늬가 생긴 것이 많았다.

아직 따는 실력이 붙지 않아 따는 게 더디기만 해서

늙어가는 오이맛 고추를 보고도 시간이 없어 다 따내질 못했다.

그래서 "야, 오이맛은 다 터져 죽으라 그래!"라고 크게 소리치며 농담을 했더니

'텃밭 언니'와 '최복토' 양의 웃음보가 빵 터졌다.

고추를 따다 말고 주저 앉아 웃는다.

 

2011년 8월 15일 월요일. 흐리고 오후에 비. 고추밭 아래 누운 '밍밍'

 

 

2011년 8월 17일 수요일. 종일 비. 저울, 고추 따는 바구니, P박스

 

 

2011년 8월 17일. 오이맛 고추를 따는 동안 따라 다니는 '밍밍'

 

 

오리걸음 자세로 고추를 두세 시간 따다 보면 약간 지루해지는 시간이 올 때가 있다.

처음에는 바람소리, 새소리, 똑똑 고추 꼭지가 떨어지는 소리가 참 듣기 좋다.

그러나 허벅지가 당기고 허리가 뻐근해지면 속력이 떨어진다.

나는 그럴 때 한 쪽에 이어폰을 끼고 노래를 들었다.

흥겨운 리듬을 듣다 보면 또 어느새 고추 따기에 신이 난다.

단연 자주 듣는 노래는 투에니원의 노래들이다.

특히 오이맛 고추를 한창 딸 때는 투에니원의 '제일 잘 나가'가 히트를 치고 있었는데

늙은 오이맛 고추를 딸 때

"내가 제일 잘 터져, 내가  제일 잘 터져~"하며

따라 불렀더니 또 '텃밭 언니'는 쓰러질 듯 웃어댄다.

이날부터 '제일 잘 나가'는 나를 대표하는 되었다.

실제 터질 듯 끝이 갈라지거나 아예 터져 죽은 오이맛 고추를 본 사람은 차라리 웃을 수밖에 없다.

이 깊은 산골에서 아이돌 그룹의 최신 가요를 들으며 고추를 따는 것도 재미있는 일이다.

아, 투에니원은 모를테지...

 

오이맛 고추는 끝이 터지고 늙어 있어 질겨 보여도 한 입 베어물면 깜짝 놀랄 정도로 연하다.

그 맛이 어찌나 달콤한지 신기할 정도이다.

구부러져 출하를 하지 못하는 파지가 많이 나와서

주변에 보내주었더니 다들 맛있다고 난리다.

이 깊은 산중에서나 나올 수 있는 맛이다.

올해는 연이은 비로 고추가 귀하다고 하는데

우리는 매 밥상마다 오이맛 고추가 올라온다.

 

 

2011년 8월 22일 월요일. 맑음. 오전 한 나절 오이맛 고추 따기

 

 

2011년 8월 26일 금요일. 구름이 있었으나 맑음. 녹광(풋고추) 아래서 자는 '밍밍'

 

 

8월 26일. 녹광(풋고추)을 따서 박스에 가지런히 담아 무게를 재어 출하한다.

꼭지가 상하지 않게 출하를 하는 것이 중요하다. 잘 익고 반듯하게 자란 것을 선별한다.

 

 

오이맛을 한창 따내고 나니 녹광도 단단하게 여물었다.

자칫 너무 늙어가고 있어서 서둘러 따서 출하를 해야 했다.

어떤 것을 따 낼지 선별하는 안목을 기르는데 녹광은 좀 시간이 걸렸다.

빛깔과 단단함의 정도를 보고 따야 한다.

덜 익은 것을 따면 소비자의 손에 당도할 때 쯤에는 쭈글쭈글해 진다고 한다.

게다가 녹광의 꼭지는 더 질겨서 속도가 붙는데 어려움이 있었다.

아, 고추 따기의 속도가 언제쯤이면 빨라지려나?

아랫집 아저씨를 보니 순식간에 몇 박스를 따던데

나와 '밍밍 엄마'가 한나절 따도 아랫집 아저씨 한 명의 속도를 당해내지 못한다.

 

이런 것들도 다 시간이 필요하다. 내공이 쌓여야 한다.

하긴 내공 없이도 원체 손이 빠른 사람이 있기는 하다.

'야인 아저씨'가 놀러와서 같이 한나절 고추 따기를 한 적이 있었는데

처음 고추 따기를 본격적으로 해 본다고 하더니

한 달 이상 고추 따기를 한 우리보다 무척 빠른 속도로 고추를 정확히 선별해서 땄다.

목수의 손이라 다른가?

나중에 풋고추 농사를 짓게 되면

음..., 남보다 더 부지런하게 시간을 투자해야 할 터이다.

 

하우스 고추밭도 퍽 성공적이지는 않다.

그나마 비를 맞지는 않았지만 햇빛을 너무 보지 못했다.

한동안 바짝 땄더니 요즘에는 영양분이 모자른지 고추가 잘 크지 않는다.

하긴 심어 놓고 아무런 약도 안 치고 양양제도 공급하지 않고 거름도 안 주고

오로지 하루에 한 번 시원한 계곡물만 주었을 뿐이다.

오직 시원한 물과 투명한 공기와 이곳 산골 흙에 뿌리를 내리고

살아 남은 것들이다.

이번에 '오체 아빠'가 거름을 주기는 했지만

추워지기 전에 얼마나 더 출하를 하게 될 지 알 수 없는 일이다.

 

 

2011년 9월 5일 월요일. 맑음. 웬일로 '대오'가 고추밭에 따라왔다.

비닐을 발톱으로 긁으며 장난질을 하더니 비닐을 많이 찢어 놓고 가버렸다. 흠, 맹랑한 녀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