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귀농 준비 시절/예비 농부의 농사 배우기(2011년)

'메밀꽃 필 무렵' 봉평에 가다

최정 / 모모 2011. 9. 29. 17:10

2011년 9월 18일 일요일. 바람불고 추움

 

 

어제 저녁 비가 한차례 지나가고 새벽에 또 잠깐 비가 지나간 후부터 바람이 거세다.

일본에 큰 태풍이 지나간다더니 그곳의 영향인지 갑자기 늦가을 날씨가 되었다.

 

어제 자비연님의 가족이 이곳에 왔다.

귀엽고 예쁜 공주님 두 명과 아내 분이 며칠 이곳에 머물며 산골 경험을 하기로 했다.

오래 해온 생각이었지만, 덜컥 추석 전 봉화의 깊은 산골에 농가가 딸린 밭을 구입하셨단다.

아하, 자비연님의 가족이 11월 귀농을 하게 되는 것이다.

참으로 쉬운 결정이 아니다.

남편이 5급 공무원인데, 나 같으면 어린 두 딸을 데리고 깊은 산골에 들어가

자급자족의 삶을 선택할 수 있었을까?

홈스쿨링을 하는 두 딸도 기특하고 멋지게 자라고 있다.

이 사회에서 정말 쉽지 않은 자급자족의 삶.

편리한 것들..., 참 많은 것들을 버려야 한다.

그러나 이 사회가 주지 않는 많은 것을 도리어 충족하는 삶이 될 것이다.

유홍준의 답사기 6편인《인생도처유상수》를 읽고서 도처에 숨어 있는 상수가 있다는

그 의미를 새삼 느끼고 있었는데, 이 가족은 정말 상수라는 생각이 든다.

곳곳에 고수가 있고, 상수가 있고, 스승이 있다.

이 산골마을에도 평생 농사를 지으며 팍팍하게 살았으나

부처의 미소를 닮은, 그런 온화한 웃음을 항상 보여주시는 분이 있으시다.

살아오신 이력을 얼핏 흘려 들어 봐도 찌들고 인상이 써질만 한데,

그런 엄청난 내공은 어디로부터 오는 걸까?

막걸리를 놓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밤이 깊었는데

아침부터 '오체 아빠'가 대뜸 손님이 오신 김에 봉평 '메밀꽃 축제'가 가자고 하신다.

 

 

 

축제를 위해 조성해 놓은 메밀꽃밭. 산허리에 핀 메밀꽃밭이었다면 더 좋았겠다.

 

 

'짐승 같은 달의 숨소리', '콩포기와 옥수수 잎새가 한층 달에 푸르게 젖었다'

아, 소설 속의 이 구절 자체가 이미 한 편의 시이다.

 

 

'돌밭에 벗어도 좋을 것을 달이 너무도 밝은 까닭에 옷을 벗으려 물레방앗간으로 들어가질 않았나'

도시에 살면 이런 구절이 잘 이해되지 않을 것이다.

주변의 불빛이 하나도 없는 산골에서 달이 밝은 날, 나도 깜짝 놀란 일이 있다.

작은 창문에 부서지는 달빛이 너무 밝아 눈이 부시다니!

이불을 눈까지 끌어 올리고 잠을 청해야 했다.

 

 

소설 속 주인공 허생원이 성처녀와 하룻밤을 보낸 물레방앗간을 재현해 놓았다.

개울에는 허생원이 건넜음직한 옛 나무다리도 재현해 놓은 것을 보았다.

 

 

메밀꽃밭을 거닐고 있는 '밍밍 엄마'

 

 

커다란 메밀꽃밭을 커다랗게 돌아 걸었다. 함께 걷고 있는 자비연님의 가족들

 

 

졸지에 관광객을 위해 마차를 끌게 된 당나귀. 어째 좀 안 돼 보였다.

 

 

이렇게 나무로 깎아 놓은 당나귀가 나는 더 귀엽고 예뻤다. 이효석 문학관에서.

 

 

메밀새싹 비빔밥. 반 정도 먹은 후에.

 

 

(메밀)묵사발. 역시 반 정도 먹은 후에.

 

 

 

날씨가 쌀쌀한 것이 못내 아쉬웠다.

하얗게 부서지는 메밀꽃들의 숨막히는 향기를 맡고 싶었는데 말이다.

아니면 달빛 아래 요염한 메밀꽃밭을 보든가...

'산허리는 온통 메밀밭이어서 피기 시작한 꽃들이 소금을 뿌린 듯이 흐뭇한 달빛에 숨이 막힐 지경이다'

소설 속의 이런 구절 같은 곳을 아무나 하고 함부로 걸어서는 안 될 일이다.

흠흠..., 그냥 아무나 하고 사랑에 빠져선 안 될 일이니까.

 

축제 마지막 날이라서 인파가 몰렸다.

직접 와서 보니 봉평은 정말 작은 산골 마을인데

이효석의 <메밀꽃 필 무렵> 하나로 일 년에 한번은 이렇게 시끌벅적한 곳으로 변하나 보다.

이미 축제를 한 지도 꽤 여러 해라 그런지 관광객을 위한 여러 가지 시설이 곳곳에 있었다.

인위적으로 재현된 메밀밭과 여러 장소를 가야 했지만

단편 소설 한 편의 힘을, 문학의 영향력을 체험할 수 있는 장소가 있다는 사실은 나름 괜찮았다.

그나마 국산 메밀이 살아 남은 것도 <메밀꽃 필 무렵>의 힘이 아닐까?

봉평은 온통 메밀을 재료로 한 음식들이 가지각색이었다.

메밀 만두, 메밀 찐빵, 메밀 막국수, 메밀 묵사발, 메밀 비빔밥, 메밀전, 각족 메밀 막걸리 등등

좀 맛있다고 소문이 난 곳은 줄을 지어 사람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우리가 들어간 식당은 아주 작은 규모였으나 그 맛에 깜짝 놀랐다. 아주 만족스러웠다.

이 엄청난 배부름에 나의 문학적 고민은 오래 갈 수가 없었다. -_-;;

그저 '짐승 같은 달의 숨소리', 달의 숨소리, 달의 숨소리...

만 몽롱하게 되새기며 돌아 왔다.

아, '짐승 같은 달의 숨소리'를 들을 수만 있다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