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귀농 준비 시절/예비 농부의 농사 배우기(2011년)

양배추 20킬로 박스를 번쩍 들기까지

최정 / 모모 2011. 9. 29. 18:00

 

2011년 9월 20일 화요일. 바람 불고 추움

 

 

골짜기 바람이 매서운 날, 드디어 해발 500여 미터 돌밭에 심은 양배추를 수확했다.

농장주와 잘 알고 지내는 남자 일꾼 2명도 얻었고

아랫집 아저씨와 아주머니도 기꺼이 품앗이를 오셨고

우리 농장 식구들까지 해서 일손이 넉넉한 날이었다.

바람만 아니었다면 딱 좋았을 텐데, 4시 30분쯤에는 벌써 산그늘이 내려와 추웠다.

나는 겨울 잠바를 입고 마스크를 쓰고 땀을 흘려야 했다.

 

아, 지금도 기억이 생생하다.

6월 초에 이틀 동안 이 밭에서 고행 수준에 가까웠던 노동의 기억.

아직 근육량이 부족했던 나에게

아침부터 해가 지는 8시 30분까지 연이어 이 밭에서 노동하는 일은 고된 일이었다.

팍팍했던 날 심었는데 다행스럽게 양배추가 잘 자리를 잡아 자라 주었다.

그런데 여름 동안은?

온통 풀밭이 되었다.

특히 피가 가슴 높이까지 자라서 낫질을 하고 나서야 겨우 양배추가 보였던 기억.

우리 농장을 방문한 여러 손님들이 도와 주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런데 지금 이 양배추들이 이렇게 단단하게 결구가 되어 제법 양배추 답다.

젊은 처자들의 근육량도 늘고 일 요령이 늘면서

더이상 우리에게 이 밭은 고행처로 인식되지 않는다.

 

 

 

온통 풀에 쌓였던 양배추밭. 배추 벌레도 많았는데...

 

 

다행히 겉잎만 벌레 구멍이 나고 속은 단단하고 야무지게 결구가 되었다.

 

 

트럭이 들어올 길을 냈다. 작든 크든 4줄을 몽땅 수확하고 비닐을 벗겼다.

 

 

양배추 밑둥을 잘라 겉잎을 벗긴다. 양배추를 들어 보니 묵직하다.

 

 

박스에 담아 저울로 20킬로 정도로 무게를 재어 출하를 한다.

 

 

양배추를 자르고 담는 것보다 트럭까지 박스를 나르는 일이 큰 일이다. 몇 백 박스를!

 

 

 

일꾼이 많은 날, 1킬로가 넘는 양배추 대부분을 수확했다.

9월 22일 목요일, 9월 25일 일요일. 이틀 더 날이 맑았던 날은

농장의 식구들만 와서 추가로 양배추를 수확했다.

전체 6개월의 고랭지 채소 농사 기간 중, 우리는 이미 5개월을 함께 했다.

이제 일손이 척척, 호흡이 척척 맞는다.

우리끼리 다니며 품을 팔아도 되겠다고 농담도 하게 된다.

 

더구나 놀라운 일은 박스 무게까지 해서 20킬로가 넘는 양배추 박스를 번쩍 들어 올리게 된 것.

6월에 양상추 수확을 할 때만 해도 15킬로 정도의 박스를 번쩍 들어 나를 수가 없었다.

나는 두세 번 날라 보고 지쳐서 둘이서 같이 들었는데 그것도 몇 번 같이 들고 나면 지쳤었다.

그런데 지금 '최복토' 양과 나는 20킬로가 넘는 양배추 박스를 번쩍 들어 꽤 날랐다.

육체 노동을 하면 몸이 이렇게 달라지는가!

 

책상에만 붙어 있던 몸인지라 살도 푸석푸석하고 근육도 없고

무거운 것은 아예 들 시도도 안 하고 손가락 힘이 없어 걸레를 꽉 짜지도 못 했던 나였는데

내 몸이 변해 있다. 손가락 마디가 굵어 지고 손 자체가 커졌다.

팔다리에 힘이 붙는 것 같더니 몸에 꽉 차는 기운을 느꼈다.

이때 쯤 나를 간만에 본 사람들은 얼굴이 좋아 보인다고 깜짝 놀라곤 했다.

그랬다. 뭔가 생겼다. 꽉 차오르는, 몸에 충만한 기운.

살결이 단단해지고 일을 해도 덜 치치는 것 같더니

양배추 박스를 번쩍 나르는 나를 발견하게 된 것이다. 

 

도시에 사는 동안 나름 열심히, 즐겁게 잘 살아 왔다고 생각했다.

긍정적으로 나름 즐기며 산 것은 맞는 말이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산골에 와서 밭을 일구고 나서야

몸 자체가 살아 움직인다는 꽉 찬 기운을 처음 느껴 본다.

몸을 스쳐가는 바람 소리, 몸에 스며드는 아침 안개,

금방 소름이 돋는 차가운 밤 공기, 굵은 땀이 몸에 뚝뚝 흐르는 간지러움까지

내 몸은 세밀하게 느낀다.

내 나이라면 이제 몸이 생물학적으로 늙어갈 일만 남았다지만 몸은 언제든 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