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창작시 - 최정/2010-2012년 시

버리고 갈 것만 남아

최정 / 모모 2012. 2. 9. 14:50

 버리고 갈 것만 남아

 

 

                               최 정

 

 

 

 냉장고는 고장난지 오래

 세탁기는 덜컹덜컹 자주 멈추고

 텔레비전 버튼은 잘 눌러지지 않아

 다행이다, 버리고 갈 것만 남아

 언제고 떠나려 새것 사지 않아 다행이다

 

 아니, 사실은 다행이지 않다

 쓸 일 없어진 침대도

 들춰본 지 오래된 책들도

 하다못해 서랍에 넣어둔 각종 고지서들도

 일일이 확인해 버려야 하고

 느려 터진 컴퓨터를 버릴까 말까

 

 도시를 청산하는 일에 버릴 것만 남아

 숨만 쉬고 사는 데도 돈을 청구하는 도시에게

 조금은 시원섭섭하고

 버릴 것들마저 돈으로 계산해 주는 도시에게

 차라리 감사해 하며

 무엇을 더 버릴까 궁리하는 하루

 

 내 마음에서는 무엇을 버리고 갈 것인지는

 차마 물어보지 못하고 날이 저문다

 굽이굽이 산을 넘어야 하는 깊은 산골에서

 늦깎이 농부로 살아 남으려면

 한 줌 흙 같은 시인이 되려면

 어느 귀퉁이 마음 한 칸 버리고 갈 것인지

 두 칸, 세 칸 아니 다 버릴 것인지

 미처 물어보지는 못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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