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규관 '빛나는 뼈' 빛나는 뼈 황규관 살점을 다 발라먹자 조기는 뼈로 누웠다 바다 속을 누비며 살 때는 전혀 예측 못한 순간이지만 가는 지느러미는 아마 보이지 않는 세계가 길렀을 것이다 원하지 않았어도 결국 뜯길 몸, 그래도 입질은 쉴 수 없었으므로 뼈라도 덩그러니 빛나는 것 아니겠는가 바다를 떠나면 죽음은 .. # 시 읽기/좋은시 읽기 2011.03.05
정호승 '슬픔이 기쁨에게' 슬픔이 기쁨에게 정호승 나는 이제 너에게도 슬픔을 주겠다. 사랑보다 소중한 슬픔을 주겠다. 겨울밤 거리에서 귤 몇 개 놓고 살아온 추위와 떨고 있는 할머니에게 귤값을 깎으면서 기뻐하던 너를 위하여 나는 슬픔의 평등한 얼굴을 보여주겠다. 내가 어둠 속에서 너를 부를 때 단 한번도 평등하게 웃.. # 시 읽기/좋은시 읽기 2011.02.17
나희덕 '뿌리에게' 뿌리에게 나희덕 깊은 곳에서 네가 나의 뿌리였을 때 나는 막 갈구어진 연한 흙이어서 너를 잘 기억할 수 있다 네 숨결 처음 대이던 그 자리에 더운 김이 오르고 밝은 피 뽑아 네게 흘려보내던 즐거움에 떨던 아 나의 사랑을 먼우물* 앞에서도 목마르던 나의 뿌리여 나를 뚫고 오르렴, 눈부셔 잘 부스러.. # 시 읽기/좋은시 읽기 2011.02.12
백석 '흰 바람벽이 있어' 흰 바람벽이 있어 백석 오늘 저녁 이 좁다란 방의 흰 바람벽에 어쩐지 쓸쓸한 것만이 오고 간다 이 흰 바람벽에 희미한 五十燭 전등이 지치운 불빛을 내어던지고 때글은 다 낡은 무명샤쯔가 어두운 그림자를 쉬이고 그리고 또 달디단 따끈한 감주나 한잔 먹고 싶다고생각하는 내 가지가지 외로운 생각.. # 시 읽기/좋은시 읽기 2011.02.06
황지우 '새들도 세상을 뜨는구나' 새들도 세상을 뜨는구나 황지우 映畵가 시작하기 전에 우리는 일제히 일어나 애국가를 경청한다 삼천리 화려 강산의 을숙도에서 일정한 群을 이루며 갈대 숲을 이룩하는 흰 새떼들이 자기들끼리 끼룩거리면서 자기들끼리 낄낄대면서 일렬 이렬 삼렬 횡대로 자기들의 세상을 이 세상에서 떼어 메고 이.. # 시 읽기/좋은시 읽기 2011.01.29
안도현 '바닷가 우체국' 바닷가 우체국 안도현 바다가 보이는 언덕 위에 우체국이 있다 나는 며칠 동안 그 마을에 머물면서 옛사랑이 살던 집을 두근거리며 쳐다보듯이 오래오래 우체국을 바라보았다 키 작은 측백나무 울타리에 둘러싸인 우체국은 문 앞에 붉은 우체통을 세워두고 하루 내내 흐린 눈을 비비거나 귓밥을 파기 .. # 시 읽기/좋은시 읽기 2011.01.28
박후기 '종이는 나무의 유전자를 갖고 있다' 종이는 나무의 유전자를 갖고 있다 박후기 싱크대 옆 선반 위 물이 담긴 유리그릇 속에서 감자 한 알이 소 눈곱 같은 싹을 틔운다 똑똑한 아기 낳는 법,이라고 씌어진 두툼한 책장을 넘기다 말고 고추장 김치 돼지고기가 들끓는 찌개 곁에서 아내가 입덧을 한다 햇볕이 잠시 문밖에서 서성이다 돌아가.. # 시 읽기/좋은시 읽기 2011.01.25
김혜수 '챔피언' 챔피언 김혜수 한 사내가 버스에 오른다 왕년에 챔피언이었다는 그의 손에 권투글러브 대신 들려 있는 한다발의 비누가 세월을 빠르게 요약한다 이 비누로 말하자면 믿거나 말거나 세탁해버리기엔 너무 화려한 과거를 팔아 링 밖에서 그는 재기하려 한다 맨 뒷자석의 여자가 단돈 천원으로 한번도 챔.. # 시 읽기/좋은시 읽기 2011.01.19
김혜수 '어디 갔니' 어디 갔니 김혜수 잃어버린 무선전화기를 냉동실에서 찾았어 어느날 내 심장이 서랍에서 발견되고 다리 하나가 책상 뒤에서 잃어버린 눈알이 화분 속에서 발견될지 몰라 나는 내가 무서워 앞마당에 나왔는데 무얼 가지러 나왔는지 도무지 기억나지 않아 괜히 화초에 물이나 주고 시든 잎이나 떼는 그,.. # 시 읽기/좋은시 읽기 2011.01.19
곽재구 '민들레 꽃씨들은 어디로' 민들레 꽃씨들은 어디로 - 연화리 시편 9 곽재구 그날 당신이 높은 산을 오르던 도중 후, 하고 바람에 날려보낸 민들레 꽃씨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요 하릴없이 무너지는 내 마음이 파, 하고 바람에 날려보낸 그 많은 민들레 꽃씨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요. 곽재구, 『꽃보다 먼저 마음을 주었네』(열림원.. # 시 읽기/좋은시 읽기 2011.01.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