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영근 '연평도의 말' 연평도의 말 박영근 저 바다가 감추고 있는 뜨거운 물길 하나를 나는 기억하고 있다 부두는 비상등 불빛으로 스스로 제 몸을 묶어 집총자세로 며칠째 말이 없고 어린 칠산바다에서 억센 파도를 배우고 황금색으로 단단해지는 비늘의 바다 서산 태안을 지나 바람 잔잔해지는 한저녁쯤에 내 깊은 곳에.. # 시 읽기/좋은시 읽기 2010.12.20
김진경 '그애의 백제 미륵반가사유' 그애의 백제 미륵반가사유 김진경 이제 여중학교짜리 애가 남자애와 살림을 차렸는지 찾아간 산동네 단칸방 앞에서 불러도 대답은 없고 방문을 여니 희미하게 비쳐드는 햇빛 속 옷궤짝 위에 턱을 괴고 멍하니 앉아 있다 슬퍼하는 겐지 무슨 비밀스러운 걸 알았다는 겐지 빙긋이 웃는 솜털이 보송보송.. # 시 읽기/좋은시 읽기 2010.12.19
허 연 '그날도 아버지는' 그날도 아버지는 허 연 낮술에 취한 아버지는 밥상을 엎고 병을 깨어들었다. 더러운 자식들, 우리가 왜 이래야 되냐고. 어머니는 까무러치듯 쓰러졌고 비가 내렸다. 비명과 함께 달려온 옆집 숙부가 아버지를 가로막았다. 형님 왜 이러세요, 나이 생각을 하셔야지요 나이를. 아버지는 4라운드짜리 권투.. # 시 읽기/좋은시 읽기 2010.12.19
이정록 '서시' 서시 이정록 마을이 가까울수록 나무는 흠집이 많다 내 몸이 너무 성하다 이정록, <벌레의 집은 아늑하다>(문학동네, 1994) 중에서 # 시 읽기/좋은시 읽기 2010.12.19
강성은 '세헤라자데' 세헤라자데 강성은 옛날이야기 들려줄까 악몽처럼 가볍고 공기처럼 무겁고 움켜잡으면 모래처럼 빠져나가버리는 이야기 조용한 비명 같은 이야기 천년 동안 짠 레이스처럼 거미줄처럼 툭 끊어져 바람에 날아가버릴 것 같은 이야기 지난밤에 본 영화 같고 어제 꿈에서 본 장면 같고 어제 낮에 걸었던 .. # 시 읽기/좋은시 읽기 2010.12.18
박후기 '채송화' 채송화 박후기 1 무너진 집안의 막내인 나는 가난한 어머니가 소파수술비만 구했어도 이 세상에 없는 아이 구석진 울타리 밑에서 흙을 먹으며 놀아도 키가 자라지 않아도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았다 2 엄마는 동생을 또 지웠다 여전히 나는 막내다 3 회를 앓는 내 얼굴은 자주 시들었다 태양을 벗어나기 .. # 시 읽기/좋은시 읽기 2010.12.17
박후기 '묵' 묵 박후기 주점 홍등 아래 앉아 묵을 먹는다 청춘을 잃고 뒤늦게 연약을 매만지는 법을 배운다 잡힐 듯 말 듯 의심 많던 손아귀에서 끝내 부서져버린 첫사랑을 생각한다 움켜진다고 가질 수 있는 사랑이 아니었으므로, 탕진한다고 벗어날 수 있는 오늘이 아니었으므로 돌아갈 여자도 도망칠 내일도 없.. # 시 읽기/좋은시 읽기 2010.12.17
이선영 '어느 대낮에 스치는 생의 풍경' 어느 대낮에 스치는 생의 풍경 이선영 때로 트럭에서 떨어져내린 배추 몇포기가 야채장수로 하여금 대로를 무단횡단하는 모험을 감행하게 한다 그냥 갈 수도 있었다 고작 몇푼 안되는 것, 그렇지만 아직 멀리 온 것은 아닌데, 여전히 눈에 밟히는데 무 배추 가득 실은 소형 트럭에는 비상등이 켜져 있.. # 시 읽기/좋은시 읽기 2010.12.16
도종환 '어머니의 채소농사' 어머니의 채소농사 도종환 한겨울에도 어머니의 손끝에서는 푸른 싹이 돋는다 반쪼가리 감자가 부엌 모퉁이에서 흙묻은 손을 내밀고 겨울 햇볕 근처로 모인 미나리들이 창 밖으로 푸른 줄기를 흔든다 밭고랑에는 턱밑에 얼음이 박힌 흙더미뿐 살아 있는 것이라곤 없는데 어머니는 정성으로 모아둔 .. # 시 읽기/좋은시 읽기 2010.12.15
민영 '풍경' 풍경 민 영 저기 수양버드나무 아래 노인 하나가 지나간다 팔을 뒤로 돌려 뒷짐을 지고 어설픈 걸음걸이로 허청허청 지나간다 새 한마리 날지 않는 쨍쨍한 대낮! 민영, <방울새에게>(실천문학사, 2007) 중에서 # 시 읽기/좋은시 읽기 2010.12.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