늘 푸른 詩야, 혹은 視野

달력 아래 누워 최 정 날짜들이 우수수 머리맡에 쌓인다 봄나들이, 여름휴가 푸른 날짜들이 잠깐 튀어 올랐다가 부서져 내린다 목 겨누던 봉급날이 바람에 날리고 술 취한 골목들이 비틀거리며 내려온다 불온한 꿈꾸던 밤들은 소화불량에 걸려 위태롭다 똑바로 눕기가 불편해 뒤척이자 ..

야행성 최 정 조간신문 도착할 때 이불 편다 일사불란하게 편집된 세상 염탐하고 비웃을 즐거움에 무거운 눈꺼풀 내린다 세상에게 편집당한 내 삶이 도착할 때

매미 최 정 생에 단 한번 필사적으로 울어본 적 있는가 몸이 텅 비도록 ≪내 피는 불순하다≫(우리글, 2008)에 수록됨

그녀는 콘크리트 속에 몸을 말고 잠든다 최 정 헉헉대는 대낮, 에어컨 폐활량은 위력적이다 밀폐된 빌딩, 21C 화석처럼 그녀는 오늘도 콘크리트 속에 몸을 말고 잠든다 머리맡엔 아스피린 두 알 ≪내 피는 불순하다≫(우리글, 2008)에 수록됨

지하인간 최 정 지하 계단 밟는 순간 방향 감각 잃어버리지만 안심하고 화살표만 따라 움직이면 된다 삼백육십오일 안전선으로 물러나라지만 일용할 바코드 움켜쥐고 2만 5천 볼트를 향해 뛰어든다 꿈을 닫겠습니다, 꿈을 닫겠습니다 등 돌린 사람들과 비비고 비틀고 비집으며 생존의 화..

아홉수 최 정 1 전화선을 타고 흰나비 떼가 날아올랐다 당신 고집을 꺾을 수 없는 건 뻔했다 하나밖에 없는 아들 군대 갔을 때 아버지 쓰러졌을 때 한바탕 굿을 하고 무릎 시리도록 치성 올려야 마음 놓던 당신이 아니었던가 온갖 질병 퍼져 퉁퉁 부어오른 당신의 예순아홉, 아홉수의 고비..

귀뚜라미 우는 밤 최 정 엉망으로 취한 골목에 퍼붓는 눈부시게 환한 은행잎들 길을 붙들고 노란 생을 토했다 비틀거리면 비틀거릴수록 부러졌던 내 더듬이 더듬더듬 살갗 뚫고 올라오는 것이었다

닭과의 동거 최 정 창문 하나 사이에 두고 동틀 때마다 벌어지는 신경전 가시 걸린 듯 쾍쾍거리는 소리 이불 뒤집어 써보지만 남의 비밀스런 얘기 엿듣는 것처럼 나도 모르게 귀가 곤두서는 것이다 다행히 통통하게 살 오를수록 녀석의 목청은 제법 경쾌하게 바뀌었고 우리의 동..

낙산 일출 최 정 방값이 얼마냐고 물었더니, 해뜨는 방 삼만원 안뜨는 방 이만원 해맞이 가든에서 저녁 먹고 해돋이 까페에서 차 마시고 해 안뜨는 방에 눌러앉고 보니 해보다 먼저 뜨는 일출장태양장해돋이여관해맞이모텔 ≪내 피는 불순하다≫(우리글, 2008)에 수록됨

돌무더기 최 정 수백 살 잡수신 늙은 소나무 바람 부는 대로 휘어있네 강에 홀로 떠있는 청령포* 둘레 돌고 돌다가 키 작은 돌무더기에 이끼 낀 나를 유배시켜 놓고 돌아서네 * 강원도 영월군에 있는 단종의 유배지 ≪내 피는 불순하다≫(우리글, 2008)에 수록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