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몰지구 수몰지구 미루나무 최 정 학교 끝나고 신나게 집으로 돌아오던 어느 날. 길가에 늘어선 키 큰 미루나무들이 일제히 베어졌다 굵은 밑둥치들만 덩그러니 줄지어 있었다. 미루나무 아래 뙤약볕 식히고 소나기 피하면서 학교가 마냥 좋았던 옆집 동무와 나. 우리가 그런 것도 아닌데 휑한 그.. # 창작시 - 최정/2010-2012년 시 2010.11.30
첫눈 첫눈 최 정 그대는 알고 있었나요 취중 진담이라도 마음 내보이고 싶어 쉽게 취하지 못하는 술을 자꾸 마시면서 시간은 또 자꾸 가고 취한 사람들 하나 둘씩 집으로 가는데 어느덧 허름한 술집은 여러 번 바뀌어 희뿌옇게 밝아오는 구석진 의자에 앉아 이젠 둘만 남아 더는 넘어가지 않는.. # 창작시 - 최정/2010-2012년 시 2010.11.30
귀 잘린 자화상 귀 잘린 자화상 최 정 고흐의 귀는 알고 있었을까 잘려나간 순간, 영원히 기억된 것을 고흐의 영혼이 완성된 것을 # 창작시 - 최정/2010-2012년 시 2010.11.30
누구나 한번쯤 누구나 한번쯤 최 정 누구나 한번쯤 생에 가장 빛나는 순간은 있다 나도 이제 평균 수명에서 절반쯤 살았다 싱싱하게 튕겨 올라 겁 없이 빛나던 청춘 더 너그러워져야겠다 스스로 빛나지 않아야겠다 # 창작시 - 최정/2010-2012년 시 2010.11.29
오체투지 오체투지 최 정 노랗게 떨어진 은행잎 무심코 깔고 앉아 무심한 눈빛으로 바라보는 저렇게 순한 개의 이름이 오체(투지)란다 어쩌자고 주인은 강원도 홍천 산골 낮은 지붕을 지키는 개에게 저리 무거운 이름을 지어준 걸까 두 무릎과 팔꿈치 심지어 이마까지 온전히 땅에 대 본적 없는 이.. # 창작시 - 최정/2010-2012년 시 2010.11.29
태풍의 꼬리 태풍의 꼬리 최 정 도시의 일상을 한 판 뒤집었다 수도권 복판을 헤집고 간 태풍이 남긴 꼬리를 쫓듯 산에 오른다 나무가 이리저리 꺾이고 뿌리째 뽑히고 태풍의 분노 선명하다 아직 망설임으로 흔들리는 나는 한 판 제대로 뒤집어지지 못했는데 심장 복판을 헤집고 들어와 태풍의 꼬리.. # 창작시 - 최정/2010-2012년 시 2010.11.29
월드컵 월드컵 최 정 평소 축구라고는 관심도 없다가 탁상 달력에 경기 일정을 빼곡 메모까지 해놓고 아프리카 땅 남아공을 상상하며 축구로 시작해서 축구로 끝나는 월드컵 채널을 고정시킨 채 여름 한 달이 간다 스포츠는 마약이라더니 90분 승부의 짜릿한 쾌감과 승자 패자의 엇갈린 운명에 .. # 창작시 - 최정/2010-2012년 시 2010.11.29
평상에 앉아 평상에 앉아 최 정 건드리면 무너질 듯 노쇠한 외딴집 지팡이에 기댄 엄마와 낡은 평상에 나란히 앉아 멀리 아랫마을 바라본다 아버지 가시고 이가 다 빠진 엄마와 나는 별로 할 말이 없어졌다 그냥 함께 같은 풍경을 오래오래 바라볼 뿐이다 쓸쓸하냐고 서로 묻지 않았다 # 창작시 - 최정/2010-2012년 시 2010.11.29
도둑고양이처럼 도둑고양이처럼 최 정 날카로운 발톱 숨기고 누군가를 미워하며 살지 않았는가 낮은 포복자세로 공격할 듯 누군가를 노려보며 살지 않았는가 언제든 도망치려고 두리번두리번 눈치 보며 살지 않았는가 좁은 구멍으로 도망쳐야 하는 같은 약자들만 미워하며 살지 않았는가 # 창작시 - 최정/2010-2012년 시 2010.11.29
고추꽃 사랑법 고추꽃 사랑법 최 정 난데없이 트렁크에 실려 백두대간을 가로지른 토종 고추가 한 평의 베란다에 겁도 없이 뿌리를 내렸다. 콜록콜록 골목 소리에 뒤척이며 불면증 걸린 가로등 빛에 잠 설치더니, 매끈하게 편집된 대한민국 뉴스 앵커의 감미로운 목소리처럼 줄기가 올라간다. 뭉게구름.. # 창작시 - 최정/2010-2012년 시 2010.11.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