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강 마을 동강 마을 최 정 옥수수를 심는 할머니의 굽은 등과 같은 기울기로 구부러진 산의 능선 지리산 아랫도리 밭두렁 들꽃도 숨죽이네 # 창작시 - 최정/2010-2012년 시 2010.11.29
가장 겸손한 일 가장 겸손한 일 최 정 모든 신경을 한 곳에 집중시키고 세상에서 가장 겸손해지는 일 욕망의 찌꺼기 뿌리째 뽑고 싶은 소박한 소망 하나만 생각하는 눈부시게 정직한 일 이른 아침 똥 누는 일 # 창작시 - 최정/2010-2012년 시 2010.11.29
이상한 봄 이상한 봄 최 정 이상한 봄이라고 일기예보는 특집보도를 한다 햇볕은 한 석 되 부족하고 온도는 딱 한 치가 모자라 바람의 꼬리가 겨울의 어금니에 물린 이상한 봄이라고 인생의 광합성 좀 해야겠다고 이 산 저 산 꽃 찾아 나섰는데 종합영양제라도 먹여야 환해질 것 같은 꽃들이 간신히.. # 창작시 - 최정/2010-2012년 시 2010.11.29
노루목 노루목 최 정 지리산 자락 흘러 내려온 노루목에는 소나무 한 그루 심어 마을이 생겼다 능선 길게 넘어온 바람 단숨에 몰려와 바람의 무늬가 새겨지는 곳 바람만이 나그네이던 이름도 아름다운 이 바람골에서 거센 북풍 막아 선 소나무는 당산 나무 되었다는데 수백년 바람골 바람막이 .. # 창작시 - 최정/2010-2012년 시 2010.11.29
새벽기도 새벽기도 최 정 「요즘 새벽기도 다녀 널 위해 매일 기도하고 있다」 뜬금없이 오랜 벗에게 문자가 왔다 이대로 노처녀로 늙어 죽을까 걱정되나? 하느님도 참 빠르시다 이 나이에 백수가 된 걸 어찌 아시고 용케 친구에게 눈치라도 줬단 말인가 이정표를 버리고 무작정 길 위에서 걷고 또.. # 창작시 - 최정/2010-2012년 시 2010.11.29
강풍주의보 강풍주의보 최 정 후두둑 굵은 빗방울 헤치고 이제 막 잠에서 깨어난 산벚꽃 긴 겨울 참 많이 아팠겠다 솜사탕 구름과 눈 맞추고 몸 비틀며 기지개 켜기도 전 전국에 내린 강풍주의보 젖은 꽃잎 꺾이네 두근대던 마음 부러지네 땅과 몸을 섞어 나무의 뿌리에 닿을 때까지 또 많이 아프겠.. # 창작시 - 최정/2010-2012년 시 2010.11.29
운명 운명 최 정 이를테면 그런 식이다 최명희의 『혼불』, 읽자마자 후배에게 줘버렸다 목숨 바쳐 쓴 그 외로움, 무서운 것이다 외로움도 극에 달하면 활활 타오르는 마른 장작처럼 제 몸 아낌없이 태우게 되는 걸까 남은 피 한 방울까지 바쳐야 마침내 춤추듯 타오르는 걸까 이를테면 그런 .. # 창작시 - 최정/2010-2012년 시 2010.11.29
강화 부근리 고인돌 강화 부근리 고인돌 최 정 여기까지 오는데 너무 오래 걸렸다 수천 년 돌덩이가 무엇이라고 나만의 순례지로 숨겨두고 미루다 서른아홉, 겁도 없이 백수가 되어 한잔 건넬 술병도 없이 빈손으로 간다 버스로 가면 금방이라는데 48번 국도 따라 8.7km 모래바람 다 맞으며 속죄하듯 걷는다 일.. # 창작시 - 최정/2010-2012년 시 2010.11.29
노을 노을 최 정 미칠 듯 타올랐다 차가워진 심장 혹 따스해질까 다시 붉은 피 돌까 여기까지 왔나 노을은 저 혼자 눈부시게 눈꺼풀 내리는 작은 섬들 사이로 붉은 심장 천천히 숨긴다 그래, 산다는 건 아픈 것이다 뜨겁게 타오르는 것도 차갑게 식어가는 것도 다 사는 것이다 아프니까 살아있.. # 창작시 - 최정/2010-2012년 시 2010.11.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