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중호우 집중호우 최 정 게보린 40알과 소주 한 병으로 세상 끝장내려는 ‘ㅅ'과 소주를 마신다 연거푸 잔 비워보지만 내 희망이란 것도 사실 얄팍하여 금세 쏟아져 내리는구나 게보린 40알로, 두통 사라지듯 스물네 살 그녀에게 모든 고통 끝날 수 있다면야 우리는 술집에 앉아 잠시 비를 피하고 .. # 창작시 - 최정/용현동 시절 시(1997-99) 2010.12.05
땅끝에서 땅끝에서 최 정 그대에게 가는 길은 처음부터 끊어져 있었다 밀물은 차오르며 지친 발목 한 걸음씩 밀어내고 땅끝에 홀로 선 토말비土末碑* 길은 없다, 꿈쩍 않지만 이 끝에서나마 그리움의 덩어리로 솟아오른 섬이 되겠다 바람이라도 불어오면 그대인 줄 알겠다 * 토말비 - 전남 해남군 .. # 창작시 - 최정/용현동 시절 시(1997-99) 2010.12.05
을왕리 을왕리 최 정 새벽 썰물 따라 걸으면 여린 달 아래 거꾸러진 닻들이 발목잡고 놓아주지 않는 을왕리 해수욕장 더 이상 올려지지 않아 켜켜이 녹슬고 있는 닻들의 무덤 그 끝에 서해가 출렁인다 돌 아 서 는 등 뒤, 환하게 불 켜는 고깃배 한 척 닻이 오르고 서해가 오르고 내 녹슨 꿈 덩달.. # 창작시 - 최정/용현동 시절 시(1997-99) 2010.12.05
부여에서 부여에서 최 정 어둠이 강을 밀어간다 금강 줄기 따라가다 고란사皐蘭寺에서 보살님이 주시는 인절미 고마워 향을 피워 올린다 낙화암에 올라서서 내 삼천 궁녀는 아니더라도 저 푸른 강물 속에 욕망의 알갱이들 내던질 수 있을까 했는데, 고란사 마당에 앉아 보니 어둠이 강을 밀어간다.. # 창작시 - 최정/용현동 시절 시(1997-99) 2010.12.05
눈송이, 이놈 눈송이, 이놈 최 정 쏟아진다, 겨울보다 감기가 먼저 오고 설사하듯 눈이 쏟아진다 미처 벗지 못한 허물은 불편하다 방바닥에 달라붙어 몸은 딱딱하게 굳어가고 눈송이들 창에 와 부딪혀 녹아내린다 저 눈송이처럼 살비듬 한 꺼풀씩 벗듯 방바닥만한 그리움 맑게 녹아 비워진다면 다행히.. # 창작시 - 최정/용현동 시절 시(1997-99) 2010.12.05
호박 넝쿨 호박 넝쿨 최 정 홈통 친친 감으며 삼층 벽돌집 기어오르는 호박 넝쿨 노오란 꽃 열병처럼 내밀고 장마 속에서 용케 여린 새순이 먼저 길 더듬어 간다 아득한 저 곳에서 어떻게 열매 맺을까 이십대는 언제나 아득했다 사랑도 혁명도 시도 곧 폭염이었다 나는 식욕도 없이 잔뜩 엉킨 넝쿨이 되어 언어에.. # 창작시 - 최정/대학 시절 시(1992-1996) 2010.12.04
그는 왼쪽으로 돌아눕지 못한다 그는 왼쪽으로 돌아눕지 못한다 아버지 최 정 그는 머슴이었다 맨몸으로 농사지어 땅 마련한 억척스런 사내였다 다락방에 몰래 숨어 있다 끌려간 그였지만 사단 전멸당하고 기적처럼 목숨 건진 그였지만 6․25 아침 밥상마다 한밤중 마신 물이 알고 보니 사람 피였다는 둥 인민군들이 까맣게 몰려 왔.. # 창작시 - 최정/대학 시절 시(1992-1996) 2010.12.04
그런 저녁이 있다 그런 저녁이 있다 최 정 짐승처럼 울고 싶은 그런 저녁이 있다 소주 얼룩진 낡은 탁자에서 닭똥집 같은 세상 씹으며 펄펄 끓는 김치찌개로 넘쳐흐르지만 짐승처럼 울고 싶은 저녁이 있다 제대로 한번 취하지 못하고 종잇장 발자국으로 웃으며 돌아서지만 차마 울 수 없는 벼랑 같은 골목 돌고 돌아야 .. # 창작시 - 최정/대학 시절 시(1992-1996) 2010.12.04
토끼풀 토끼풀 최 정 비쩍 마른 검둥이가 외양간 독차지하더니 돼지우리엔 토끼들만 조몰조몰 몰려다닌다 두어 달 병원에서 손톱 허옇게 흙물 벗은 아버지 밥만큼 약을 삼키고 여름내 토끼풀만 뜯는다 어릴 적 동무들과 뛰어놀다 지치면 뜯어오던 토끼풀 아버지, 이제 그냥 편히 쉬세요 아녀, 가을 되믄 토끼.. # 창작시 - 최정/대학 시절 시(1992-1996) 2010.12.04
정화수 정화수 어머니 최 정 우물가 앵두나무 가지로 달 오르면 물 한 사발 장독대에 올리고 합장하는 아낙네 지발 빌어유, 지아비 무사혀두룩 보살펴 주셔유 다 자란 곡식 두고 눈물로 떠난 피난길 남편은 낯선 군인들에게 끌려가고 가뭄처럼 젖 말라 바락바락 악 쓰던 첫아들 보리물만 먹다 백일 못 넘기고 .. # 창작시 - 최정/대학 시절 시(1992-1996) 2010.12.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