혀 혀 최 정 그녀는 몇 달간 한 마디도 안하고 지냈다고 한다 말하는 법을 잊을까봐 난생 처음 써 봤다며 시 한 편 내미는 그녀의 손이 가늘게 떨린다 갑자기 사막에 선 것처럼 갈증이 몰려온다 연거푸 술을 들이켜고 마구 지껄인다 이 시는 너의 외로움이야 너의 비명일 뿐이라구 그녀는 여.. # 창작시 - 최정/용현동 시절 시(1997-99) 2010.12.05
사월 사월 최 정 내가 할 말은 죽은 자들이 이미 다 써 버렸다 억지로 희망을 붙잡는 것 따위는 더 이상 않기로 다짐했다 어리석은 비유와 상징에 갇혀 잠시 부풀어 올랐던 내 청춘은 곤두박질쳤다 종일 내린 비 일기예보는 적중했고 몸이 너무 가볍다 ≪내 피는 불순하다≫(우리글, 2008)에 수.. # 창작시 - 최정/용현동 시절 시(1997-99) 2010.12.05
진달래 필 무렵 진달래 필 무렵 엄마의 꽃2 최 정 언제 꽃 피는지 잊어버린 목소리가 녹슨 호미날 같다 진달래 꺾어 꽂아두고 꽃 보러 오라 전화하던 어머니 지천으로 꽃 피었을 산이 궁금해 달려가곤 했다 뜰아래 채송화처럼 은근히 모녀지간 확인하던 진달래 필 무렵 꽃 보러 오란 말씀 없는 칠십 고개 .. # 창작시 - 최정/용현동 시절 시(1997-99) 2010.12.05
소나무 소나무 최 정 아랫배가 싸하게 아프기 시작했어요 엄마는 말했어요 진짜 여자가 된거여 니도 이제 고생길 훤 한거여 좌르르 쏟아지는 검붉은 피 산다는 게 불길하게 느껴졌어요 빨랫줄에 다섯 딸 달거리 광목천 펄럭였던 집 아들 얻자고 마흔에 날 낳았다죠 폐경기 엄마가 사준 생리대가.. # 창작시 - 최정/용현동 시절 시(1997-99) 2010.12.05
콩나물 대가리 콩나물 대가리 최 정 컴컴한 부뚜막에서 달그락거리는 소리 막내야, 시루에 물 준겨? 골방 가득 노랗게 올라오는 콩나물 대가리 물만 먹고 올라오는 게 신기해 한참 쭈그리고 앉아 있으면 볕 보면 안 되는 거여 어느새 시루에 덮어지는 보자기 부엌에선 매캐한 연기가 꼬리를 잇고 살금살.. # 창작시 - 최정/용현동 시절 시(1997-99) 2010.12.05
역마살 역마살 최 정 딸년 객지생활 십년이 불안한 어머니는 사주팔자 보고 살풀이 부적 쥐어주었다 달거리마다 쏟은 더러운 피가 묻어났다 내가 선 길들은 언제나 먼지로 가득해서 낯선 길로 닿는 차표를 끊곤 했다 어찌 모르겠는가 곰팡이 핀 상처들마저 비워야 내 안의 길에 닿을 수 있다는 .. # 창작시 - 최정/용현동 시절 시(1997-99) 2010.12.05
안동에 가려거든 안동에 가려거든 최 정 백두대간 줄기마다 둥지 틀고 사는 두메에서 잠시 숨 돌리며 산을 끼고 도는 개울 따라 갈 일이다 부지런한 과수나무들 뿌리박고 서 있는 골짜기 돌아 부드러운 능선 험해지다 다시 부드러워지는 겹겹의 산 넘다보면 안동 똥고집이라는 자존심이 보인다 곧장 하회.. # 창작시 - 최정/용현동 시절 시(1997-99) 2010.12.05
감나무 식당 감나무 식당 최 정 허기진 내게 까치밥 한 그릇 공양해줄까 두드린 감나무 식당 낮잠에서 막 깨어난 할머니가 끓여 낸 김치 전골 경상도 음식 짜기로 유명하다지만 깜박 잊고 까치밥 뚝딱 비웠을 때 여기가 바로 불국사佛國寺로구나 난로 가에 졸고 있는 누렁이 눈 한번 껌벅일 때마다 백.. # 창작시 - 최정/용현동 시절 시(1997-99) 2010.12.05
해탈문 해탈문解脫門 최 정 해탈할 수 있을까 門 들어서는 순간, 산 아래 면벽 중인 도갑사道岬寺 물 한 모금 마시고 산사의 고요 밟을 때마다 주저앉은, 세속에 묻어 둔 이력 출렁이네 다시 일어설 수 있을까 門 나서는 순간, 늙은 중 하얀 입김 피어오르는 범종소리 산을 깨우네 깜빡 졸던 야윈 .. # 창작시 - 최정/용현동 시절 시(1997-99) 2010.12.05
비결 비결 최 정 동학군 비결 나왔다는 마애불 찾아 나선 도솔암 입구 돌비석, `등산로 없음` 옆길로 올라보니 낙조대만 솟아있네 가파른 불경소리 비결은 없었는지 몰라 그저 퍼런 죽창이었는지 몰라 동학군이 비결 빼가려고 중들 결박했던 선운사 앞마당에 붉은 감들만 주렁주렁 저렇게 탱.. # 창작시 - 최정/용현동 시절 시(1997-99) 2010.12.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