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골의 하루 산골의 하루 최 정 찬 기운 털고 일어나 아궁이에 불을 지핀다 배추 된장국에 밥 한 술 뜨고 개밥 고양이밥 주고 봄 햇살에 잔설 녹는 소리 들리는 오늘은 춘분 웅크렸던 몸 햇살에 말리며 땔 나무 주워 모으다 고로쇠물 한 사발 들이켜니 내 몸도 고로쇠나무처럼 땅속 깊숙이 뿌리를 뻗을.. # 창작시 - 최정/2010-2012년 시 2012.03.23
버리고 갈 것만 남아 버리고 갈 것만 남아 최 정 냉장고는 고장난지 오래 세탁기는 덜컹덜컹 자주 멈추고 텔레비전 버튼은 잘 눌러지지 않아 다행이다, 버리고 갈 것만 남아 언제고 떠나려 새것 사지 않아 다행이다 아니, 사실은 다행이지 않다 쓸 일 없어진 침대도 들춰본 지 오래된 책들도 하다못해 서랍에 .. # 창작시 - 최정/2010-2012년 시 2012.02.09
막차 막차 최 정 막차, 이 말은 나를 설레게 한다 시외로 가는 차표를 끊곤 했다 여고 2학년 하숙생 시절 낯선 곳을 떠도는 방랑자처럼 나의 설렘은 차창에 부딪치는 바람을 가르며 질주했다 아직 도착하지 않은 나의 미래가 엉킨 실타래처럼 창밖으로 펼쳐졌다 그러나 알고 있었다 하숙집으로.. # 창작시 - 최정/2010-2012년 시 2012.02.06
추석 전야 추석 전야 최 정 기울어진 지붕 아래로 쉴 새 없이 빗물이 흘러내립니다. 다 된 형광등처럼 팔순 노모의 기억력이 깜빡깜빡합니다. 그럴 때마다 내 마음도 같이 깜빡깜빡합니다. 긴 초저녁잠에서 깨어난 노모가 분주하게 움직입니다. 이불을 개고 세수를 하고 옷을 단정하게 갈아 입으십.. # 창작시 - 최정/2010-2012년 시 2011.09.14
학생과학대사전 학생과학대사전 최 정 책장 구석에 박힌 학생과학대사전.버리려고 펼쳐보니 갈피마다 껌 종이들이 끼워져 있네. 명시와 옛시조 새겨진 아, 추억의 에뜨랑제 츄잉껌 종이들이 살랑살랑 일렁이네. 수백 장의 껌 종이를, 아니 수백 편의 시를 쪼그리고 앉아 벌 받듯 읽어 가네. 스무 살 어느 .. # 창작시 - 최정/2010-2012년 시 2011.03.08
하얀 그림자 하얀 그림자 최 정 쿵, 둔탁한 소리가 나고 창밖이 시끄러웠다. 밖의 상황이 궁금한 아이들을 다잡아 수업을 계속했다. 곧 중간고사였고, 나는 단 1점이라도 점수를 올려야 하는 입시학원 강사였다. 사이렌 소리에도 아랑곳없이 문제풀이에 열을 올렸다. 쉬는 시간에 들으니 둔탁한 소리.. # 창작시 - 최정/2010-2012년 시 2011.02.10
304호의 이별 방식 304호의 이별 방식 최 정 S# 1 창문 깨지는 소리와 함께 외마디 비명으로 304호가 뛰쳐나왔다. 나는 잠이 들락 말락 뒤척이다 다급하게 불을 켰다. 도둑이 들었다는 생각에 급히 겉옷을 챙겨 입었다. 어떻게 이런 식으로 헤어져! 사귄지 100일인데 그 새 어떻게 딴 놈을 만나! 남자가 저주를 퍼.. # 창작시 - 최정/2010-2012년 시 2011.01.29
상고 시대를 아느냐 상고上古 시대를 아느냐 최 정 1. 상고 시대를 아느냐고 물었다 학교에서 배운 적이 없다고 답해 드렸다 하얀 수염이 긴 백발의 할아버지는 안타깝다는 듯 혀를 끌끌 찼다 허리가 꼿꼿한 할아버지에게 지팡이는 장신구 같았다 읍내 가는 버스가 한참만에야 왔다 2. 빙판길에 넘어져 퉁퉁 .. # 창작시 - 최정/2010-2012년 시 2011.01.17
해와 달이 뜨고 지는 해와 달이 뜨고 지는 최 정 해가 뜨고 지는 길 따라 싹 틔우고 가지 뻗으면 될 것을 무엇을 바라 조급하게 꽃 피우려 했나 강물을 거슬러 기진맥진 앞서가려 했나 달이 뜨고 지는 길 따라 땅에 몸 누이고 잠들면 될 것을 무엇을 바라 화려한 불빛 쫓아 억지로 불 밝혀 살려고 했나 해와 달이.. # 창작시 - 최정/2010-2012년 시 2011.01.04
생매장은 싫어요 생매장은 싫어요 최 정 밤마다 꿈에 시달려요, 구덩이에 던져져 생매장 당하는 악몽을 꾸어요, 아무리 소리를 질러도 아무도 없어요, 무서워요, 너무 무서워서 숨이 막혀요, 차라리 목을 졸라 주세요, 아니 단번에 죽을 수 있게 전기 충격을 주세요, 독약을 구해 주세요, 차라리 아우슈비.. # 창작시 - 최정/2010-2012년 시 2011.01.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