늙은 나무의 노래 늙은 나무의 노래 전등사傳燈寺에서 최 정 군더더기 다 버리니 몸통만 남았구나 한줌 안 되는 노란 잎 자잘한 욕망의 껍데기처럼 무겁구나 다 내주니 받아라 고목이라고 쓸쓸한 눈빛 건네지 마라 바람소리 한 오백년 듣다 보면 알게 되리라 남은 몸통마저 텅 비우고 바람보다 가벼워지고.. # 창작시 - 최정/부평동 시절 시(1999-2009) 2010.12.05
동굴에 갇힌 그대여 동굴에 갇힌 그대여 최 정 동굴로 들어간 그대여 가는 어깨 떨고 있구나 빛이 보일까 등 돌리고 눈 질끈 감고 있구나 닿을 수 없는 깊은 곳으로 뒷걸음질 했구나 동굴에 갇힌 그대여 그곳에도 맑은 샘물 흐르니? 신들이 흘리고 간 사랑의 묘약 마르지 않았니? 켜켜이 쌓이는 어둠의 입자 .. # 창작시 - 최정/부평동 시절 시(1999-2009) 2010.12.05
표본실의 청개구리 표본실의 청개구리 최 정 염상섭의 ‘표본실의 청개구리’, 길지도 않은 이 소설을 끝내 완독하는데 실패했다 마지막 장을 읽기도 전에 깊은 잠에 빠져들곤 하는 것이다 제목을 읽는 순간 재생되는 과학실의 형광등 불빛 유리병 속 마취된 개구리 집어 올릴 때 느껴지던 차가운 핀셋의 .. # 창작시 - 최정/부평동 시절 시(1999-2009) 2010.12.05
시월의 마지막 밤 시월의 마지막 밤 최 정 지금도 기억하고 있어요 시월의 마지막 밤을 …… 한마디 변명도 못하고 잊혀 져야 하는 건가요* 그러나, 알고 있지 시월의 마지막 밤 벼락같이 찾아온 사랑 날카로운 핀을 박아 박제시킨 사람은 알게 되지 사람들 좋아하는 쓸쓸한 이 노래 쉽게 따라 부를 수 없다.. # 창작시 - 최정/부평동 시절 시(1999-2009) 2010.12.05
독감 독감 최 정 1 열이 오르락내리락 코피를 쏟았다. 지독한 겨울이었다. 열이 내리고 닥치는 대로 먹어 치웠다. 보물 목록 완성하듯 일기장엔 먹고 싶은 것들로 채워졌다. 먹어도 자꾸 허기졌다. 키가 부쩍 자랐다. 그리고 6학년 졸업이었다. 빨리 어른이 되고 싶었다. 2 아무리 계산해도 1학점.. # 창작시 - 최정/부평동 시절 시(1999-2009) 2010.12.05
아파트 숲을 산책하는 오후 아파트 숲을 산책하는 오후 최 정 아파트적인 높이, 아파트적인 공간, 아파트적인 지적 수준, 아파트적인 감성, 충만한 아파트 족들, 일렬횡대로 밀집해, 한 시절 잘 살았다고, 서기 3000년대 후세인들은 기억해 줄까 참, 아파 저렇게 절정으로 발기勃起한 것들, 언젠가 무너지게 될 텐데, .. # 창작시 - 최정/부평동 시절 시(1999-2009) 2010.12.05
오동도 오동도梧桐島 최 정 여수 앞바다 작은 섬 오동도에 혼자 가지 마세요 아득한 방파제 홀로 걸어 바다를 건너지 마세요 동백나무 숲속 송이, 송이 붉은 꽃잎 밟아야 하는 오동도에 가려거든 뒤돌아서면 자신의 목 부러뜨려 일제히 바다에 뛰어드는 붉은 동백 보려거든 ≪내 피는 불순하다.. # 창작시 - 최정/부평동 시절 시(1999-2009) 2010.12.05
지리산 피아골 지리산 피아골 최 정 하얗게 마른 뼈들이 흑백 필름처럼 줄지어 선 고사목 지나 왜 하필이면 피아골에서 길을 잃었던 것일까 빨치산의 붉은 피 흘러 시뻘건 단풍 든다는 피아골에서 갑자기 빗물이 폭포처럼 퍼붓던 그 가파른 골짜기에서 장엄하게 펼쳐진 길고 긴 능선 서른 살에 꼭 다시 .. # 창작시 - 최정/부평동 시절 시(1999-2009) 2010.12.05
젊은 아버지 젊은 아버지 최 정 나는 늘 젊은 아버지가 그리웠다 제일 먼저 일어나 커다란 지게 지고 대문 나섰다는 젊은 아버지 뒷모습이 궁금했다 황소 같은 입김 새벽 공기에 반짝이는 젊은 아버지를 상상하며 어른이 되었다 스무 살, 중환자실로 실려 온 아버지 초라하게 늘어진 성기性器 처음 본.. # 창작시 - 최정/부평동 시절 시(1999-2009) 2010.12.05
열꽃 열꽃 최 정 온몸에 열꽃이 피었어요 열도 꽃처럼 피어나면 향기로울까요 붉게 피어난 어둠처럼 아플까요 열꽃 핀 자리마다 고름이 고여요 어둠 같은 고름 하나 둘 터지네요 열꽃이 피면 사랑하게 될까요 운명 같은 사랑하게 될까요 스치기만 해도 쓰린 상처처럼 붉은 꽃 피울 수 있을까.. # 창작시 - 최정/부평동 시절 시(1999-2009) 2010.12.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