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석 전야 추석 전야 최 정 기울어진 지붕 아래로 쉴 새 없이 빗물이 흘러내립니다. 다 된 형광등처럼 팔순 노모의 기억력이 깜빡깜빡합니다. 그럴 때마다 내 마음도 같이 깜빡깜빡합니다. 긴 초저녁잠에서 깨어난 노모가 분주하게 움직입니다. 이불을 개고 세수를 하고 옷을 단정하게 갈아 입으십.. # 창작시 - 최정/2010-2012년 시 2011.09.14
장유 '시골로 돌아와', '농부의 일' 시골로 돌아와 1 장유 남쪽 산모퉁이에 밭을 일구고 북쪽 산굽이엔 오두막을 지었네. 아침엔 밭에 나가 일을 하고 저녁엔 돌아와서 책을 읽네. 주변에선 나의 고생 비웃겠지만 내게는 더없는 즐거움이라네. 이제야 알겠네, 농사일 배우는 게 벼슬하는 것보다 더 낫다는 것을. 농부의 일 장유 사람의 마.. # 시 읽기/좋은시 읽기 2011.08.27
김윤이 '오렌지는 파랗다' 오렌지는 파랗다 김윤이 파란, 오렌지 둥근 탁자 위에 누가 저며놓았나 즙액이 흐르네 식탁을 마주하고 있는 동안 화병의 물은 한정없이 썩어가고 장미꽃잎 한 점 눈꺼풀처럼 스르르 떨어지네 어항 속의 금붕어는 빨간 아가미로 떠다니고 탁자위의 파란, 오렌지 누가 저며놓았나 빨간 살점 헤적이며 .. # 시 읽기/좋은시 읽기 2011.04.28
김태형 '당신 생각' 당신 생각 김태형 필경에는 하고 넘어가야 하는 얘기가 있다 무거운 안개구름이 밀려들어 귀밑머리에 젖어도 한번은 꼭 해야만 되는 얘기가 있다 잠든 나귀 곁에 앉아서 나귀의 귀를 닮은 나뭇잎으로 밤바람을 깨워서라도 그래서라도 꼭은 하고 싶은 그런 얘기가 있다 김태형, 《코끼리 주파수》(창비.. # 시 읽기/좋은시 읽기 2011.04.23
천양희 '그자는 시인이다' 그자는 시인이다 천양희 그는 일생을 쓰면서 탕진했다 탕진도 힘이었다 그 힘으로 피의 문장을 썼다 불꽃 삼키고도 매운 연기 내는 굴뚝의 문장 시뻘건 꽃 피우다 모가지께 툭, 떨어지는 동백의 문장 모천회귀하려다가 불귀의 객이 되는 연어의 문장 문장을 들고 두려움과 슬픔을 이기기 위해 쓰고 쓰.. # 시 읽기/좋은시 읽기 2011.04.22
학생과학대사전 학생과학대사전 최 정 책장 구석에 박힌 학생과학대사전.버리려고 펼쳐보니 갈피마다 껌 종이들이 끼워져 있네. 명시와 옛시조 새겨진 아, 추억의 에뜨랑제 츄잉껌 종이들이 살랑살랑 일렁이네. 수백 장의 껌 종이를, 아니 수백 편의 시를 쪼그리고 앉아 벌 받듯 읽어 가네. 스무 살 어느 .. # 창작시 - 최정/2010-2012년 시 2011.03.08
황규관 '우회하는 길' 우회하는 길 황규관 이 길이 우회하는 길이다. 부딪혀 흘려야 할 피를 피한다고 욕하지 마라 강물을 따라가는 길 산모퉁이를 돌아가는 길이다 풍경을 훔치려는 허튼 욕망을 끝내 버리지 못한다 해도 가마득한 벼랑을 옆구리에 끼고도는 길이다 힘차게 휘어지는 물살이 어지러워 말을 빼앗기는 길이다 .. # 시 읽기/좋은시 읽기 2011.03.05
황규관 '빛나는 뼈' 빛나는 뼈 황규관 살점을 다 발라먹자 조기는 뼈로 누웠다 바다 속을 누비며 살 때는 전혀 예측 못한 순간이지만 가는 지느러미는 아마 보이지 않는 세계가 길렀을 것이다 원하지 않았어도 결국 뜯길 몸, 그래도 입질은 쉴 수 없었으므로 뼈라도 덩그러니 빛나는 것 아니겠는가 바다를 떠나면 죽음은 .. # 시 읽기/좋은시 읽기 2011.03.05
정호승 '슬픔이 기쁨에게' 슬픔이 기쁨에게 정호승 나는 이제 너에게도 슬픔을 주겠다. 사랑보다 소중한 슬픔을 주겠다. 겨울밤 거리에서 귤 몇 개 놓고 살아온 추위와 떨고 있는 할머니에게 귤값을 깎으면서 기뻐하던 너를 위하여 나는 슬픔의 평등한 얼굴을 보여주겠다. 내가 어둠 속에서 너를 부를 때 단 한번도 평등하게 웃.. # 시 읽기/좋은시 읽기 2011.02.17
나희덕 '뿌리에게' 뿌리에게 나희덕 깊은 곳에서 네가 나의 뿌리였을 때 나는 막 갈구어진 연한 흙이어서 너를 잘 기억할 수 있다 네 숨결 처음 대이던 그 자리에 더운 김이 오르고 밝은 피 뽑아 네게 흘려보내던 즐거움에 떨던 아 나의 사랑을 먼우물* 앞에서도 목마르던 나의 뿌리여 나를 뚫고 오르렴, 눈부셔 잘 부스러.. # 시 읽기/좋은시 읽기 2011.02.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