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고 시대를 아느냐 상고上古 시대를 아느냐 최 정 1. 상고 시대를 아느냐고 물었다 학교에서 배운 적이 없다고 답해 드렸다 하얀 수염이 긴 백발의 할아버지는 안타깝다는 듯 혀를 끌끌 찼다 허리가 꼿꼿한 할아버지에게 지팡이는 장신구 같았다 읍내 가는 버스가 한참만에야 왔다 2. 빙판길에 넘어져 퉁퉁 .. # 창작시 - 최정/2010-2012년 시 2011.01.17
해와 달이 뜨고 지는 해와 달이 뜨고 지는 최 정 해가 뜨고 지는 길 따라 싹 틔우고 가지 뻗으면 될 것을 무엇을 바라 조급하게 꽃 피우려 했나 강물을 거슬러 기진맥진 앞서가려 했나 달이 뜨고 지는 길 따라 땅에 몸 누이고 잠들면 될 것을 무엇을 바라 화려한 불빛 쫓아 억지로 불 밝혀 살려고 했나 해와 달이.. # 창작시 - 최정/2010-2012년 시 2011.01.04
생매장은 싫어요 생매장은 싫어요 최 정 밤마다 꿈에 시달려요, 구덩이에 던져져 생매장 당하는 악몽을 꾸어요, 아무리 소리를 질러도 아무도 없어요, 무서워요, 너무 무서워서 숨이 막혀요, 차라리 목을 졸라 주세요, 아니 단번에 죽을 수 있게 전기 충격을 주세요, 독약을 구해 주세요, 차라리 아우슈비.. # 창작시 - 최정/2010-2012년 시 2011.01.03
떠돌이 식물 떠돌이 식물 최 정 나는 식물이다 태양을 안아 대기와 사랑 나누고 땅의 젖줄 빨아올려 숨을 쉬는 식물이다 그러나 나는 자유로운 영혼을 지닌 떠돌이 식물 지구가 커다란 부레를 펼쳐 광활한 우주를 주유하듯 나는 지구에 올라타 몸통을 도시락처럼 싸들고 날마다 날마다 죽을 때까지 떠.. # 창작시 - 최정/2010-2012년 시 2010.12.24
대설 대설大雪 최 정 막걸리 잔이 몇 순배 돌아가고 눈이 날린다 눈처럼 축축해진 몸을 끌고 들어와 포근한 이불 속에 파묻는다 창밖에는 여전히 눈이 날린다 이불깃을 얼굴까지 끌어올리자 잠이 눈처럼 쏟아진다 죽음도 이렇게 노곤한 잠처럼 찾아와 준다면 참 따스할 텐데 창밖에는 밤이 새.. # 창작시 - 최정/2010-2012년 시 2010.12.08
우물 우물 최 정 어둠이 물감처럼 풀어진 우물이 있었다 아이가 퍼 올리고 퍼 올리는 커다란 두레박에는 어둠이 가득 했다 함께 살던 돼지가 목을 따인 채 우물 옆에서 붉은 피를 콸콸 쏟아냈다 우물에는 늘 이끼가 푸르렀다 아이도 이끼처럼 빨리 자랐다 어둠을 퍼 올리고 퍼 올리면 언젠가 .. # 창작시 - 최정/2010-2012년 시 2010.12.06
감시의 눈 감시의 눈 최 정 초저녁부터 반짝이는 별이 있어 눈 마주치며 설레었는데 혼자 빛나는 저 별이 인공위성이라 한다 침실의 은밀한 속살까지 훔쳐보는 외눈박이 눈빛이었다 한다 원형 감옥 같은 지구에서 이제 숨을 곳은 어디인가 # 창작시 - 최정/2010-2012년 시 2010.12.06
참 오래 걸렸네 참 오래 걸렸네 최 정 사랑을 잃고 나는 쓰네* 이 한 줄의 어둠 이해하는데 참 오래 걸렸네 영영 몰라도 좋았을 걸 * 기형도의 <빈 집> 중에서 # 창작시 - 최정/부평동 시절 시(1999-2009) 2010.12.05
구름에게 구름에게 최 정 막대기로 툭 건드리면 금방 울음 터질듯 네 안에 가둔 어둠 무서워 노을조차 숨겼니? 밤새 줄기차게 찬 비 # 창작시 - 최정/부평동 시절 시(1999-2009) 2010.12.05
거울 속의 그녀 거울 속의 그녀 최 정 영혼을 저당 잡힌 거울 속의 그녀 청춘을 탕진하고 주름살 세어보는 그녀 낯설다, 거울 속 어색하게 웃으려는 그녀 아직 화해할 수 없다 대신 빛나던 영혼 반품해 오라 요구하지 않겠다 # 창작시 - 최정/부평동 시절 시(1999-2009) 2010.12.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