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줄도 너무 길다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 번개를 보면서도 삶이 한 순간인 걸 모르다니! - 바쇼 - 꽃잎 하나가 떨어지네 어, 다시 올라가네 나비였네! - 모리다케- 류시화 엮음, <한 줄도 너무 길다>(이레, 2000) 중에서 하이쿠 시 모음집인데, 하이쿠는 세계에서 가장 짧은 시형태로 유명하다고 합니다. 압축의 압축미! # 시 읽기/좋은시 읽기 2010.12.04
장석남 '싸리꽃들 모여 핀 까닭 하나를' 싸리꽃들 모여 핀 까닭 하나를 장석남 한 덩어리의 밥을 찬물에 꺼서 마시고는 어느 절에서 보내는 저녁 종소리를 듣고 있으니 처마 끝의 별도 생계를 잇는 일로 나온 듯 거룩해지고 뒤란 언덕에 보랏빛 싸리꽃들 핀 까닭의 하나쯤은 알 듯도 해요 종소리 그치면 흰 발자국을 내며 개울가로 나가 손 씻.. # 시 읽기/좋은시 읽기 2010.12.04
문동만 '청어' 청어 문동만 청어는 포식자에게 잡아먹히면 그놈의 오장육부에 잔가시를 박으며 기꺼이 죽어준다고 한다 아무리 힘센 놈이라도 그 잔가시의 껄끄러움을 견디지 못하고 다음부터는 청어를 잡아먹지 않는다 한다 그리하여 나머지 청어들은 안녕하고 가끔 몇몇의 청어는 자진하여 검은 아가리 속으로 .. # 시 읽기/좋은시 읽기 2010.12.03
황진이 '동짓날 기나긴 밤을' 동짓날 기나긴 밤을 황진이 동짓날 기나긴 밤을 한 허리를 베어내어 춘풍(春風) 이불 아래 서리서리 넣었다가 어론님 오신 날 밤이어든 굽이굽이 펴리라 - <한국고전시가선>(창작과비평사, 1997) 중에서 - 하, 어느 구절 하나 절창이 아닌 구절이 없어서 저절로 카아---, 감탄사가 나옵니다. 가장 춥고.. # 시 읽기/좋은시 읽기 2010.12.02
박경리 '옛날의 그 집' 옛날의 그 집 박경리 빗자루병에 걸린 대추나무 수십 그루가 어느 날 일시에 죽어 자빠진 그 집 십오 년을 살았다 빈 창고같이 휭덩그레한 큰 집에 밤이 오면 소쩍새와 쑥꾹새가 울었고 연못의 맹꽁이는 목이 터져라 소리 지르던 이른 봄 그 집에서 나는 혼자 살았다 다행히 뜰은 넓어서 배추 심고 고추.. # 시 읽기/좋은시 읽기 2010.12.01
고정희 '고백' 고백 고정희 너에게로 가는 그리움의 전깃줄에 나는 감 전 되 었 다 고정희의 <아름다운 사람 하나>(푸른숲, 1996) 중에서 # 시 읽기/좋은시 읽기 2010.12.01
문부식 '눈 내리는 겨울밤에 쓴 마지막 시' 눈 내리는 겨울밤에 쓴 마지막 시 문부식 이 눈 밟고 가게 될 것인가 저기 낮은 담을 돌아 사형장으로 가는 길 위로 눈이 내린다 어둠 속에서 지금 눈을 맞고 선 헐벗은 나무들 그 옆을 지나 사형장이 보이면 대개 반은 죽은 사람이 되고 만다지 철문이 열리고 잠시 머물던 독방을 나와 사형장까지 그 몸.. # 시 읽기/좋은시 읽기 2010.12.01
최성민 '시집詩集을 사다' 시집詩集을 사다 최성민 지하철이 비틀거리며 등을 돌리는 배다리 철길 아래 세월이 주저앉은 책방에서 낯익은 이름 하나 발견하고 절반 값으로 책 한 권 품는다 한쪽 귀 찢어진 책장을 펴면 까아만 글자들이 일제히 일어나 내 가슴 언저리에 박혀 울창한 숲을 이룬다 굵은 가지를 힘차게 뻗으며 하늘.. # 시 읽기/좋은시 읽기 2010.11.30
나희덕 '물소리를 듣다' 물소리를 듣다 나희덕 우리가 싸운 것도 모르고 큰애가 자다 일어나 눈 비비고 화장실 간다 뒤척이던 그가 돌아누운 등을 향해 말한다 당신...... 자?...... 저 소리 좀 들어봐...... 녀석 오줌 누는 소리 좀 들어봐...... 기운차고...... 오래 누고...... 저렇도록 당신이 키웠잖어...... 당신이...... 등과 등 사이.. # 시 읽기/좋은시 읽기 2010.11.30
이세기 '침' 침 이세기 세상을 어둡게 보아서인가 점자를 읽어내리던 손을 잠시 거두고 침구사는 내게 말한다 화가 머리에 응혈되어 있어 풀어야겠습니다 짚었던 맥을 가만히 놓더니 몸을 지켜야지요 침을 놓는 장님의 손은 천수의 눈을 가졌는지 혈맥을 짚더니 혈자리를 찾아 침을 놓는다 기혈이 뚫릴 때까지 침.. # 시 읽기/좋은시 읽기 2010.11.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