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마 그친 뒤 장마 그친 뒤 최 정 언제 내려앉을지 모르는 자취방 지붕 방패 같은 우산 속에서 눅눅한 이불 되어 오가던 강의실 젖은 신발 떼 몰려다니던 5번 버스 종점 길에서 닭장차에 끌려간 친구들 장마 그친 뒤 발은 쓸데없이 퉁퉁 부어오르고 입안 가득히 핀 곰팡이 은행나무 몽둥이처럼 줄지어 서 있는 5번 버.. # 창작시 - 최정/대학 시절 시(1992-1996) 2010.12.04
장마 장마 최 정 부엌바닥 구석 기어 다니다 밥그릇까지 타고 올라온 곰팡이 ‘장마전선 영향으로 흐리고 비 오겠음’ 애야, 물가에는 절대 놀러가지 마라 눅눅한 이불 타고 꿈속까지 기어드는 곰팡이 # 창작시 - 최정/대학 시절 시(1992-1996) 2010.12.04
봄앓이 봄앓이 최 정 부엌문 앞 화들짝 피어난 앵두꽃 바람이라도 불어 꽃잎 날아들면 나는 괜히 꾀병을 부렸습니다 뿌연 밤하늘 몇 개의 별 서성이고 가더니 앵두꽃 떨어진 자리마다 속살처럼 뽀얀 앵두가 동글동글 몸을 불리고 있습니다 # 창작시 - 최정/대학 시절 시(1992-1996) 2010.12.04
여름의 끝 여름의 끝 최 정 헤픈 웃음과 자잘한 수다가 벌레처럼 기어오른다 나뭇잎들은 잔뜩 먼지 뒤집어쓰고 꼬옥 달라붙어 있다 몸에서는 신공안정국 마녀 사냥처럼 썩은 땀이 붙어 다닌다 난 가뭄처럼 말이 없어졌다 # 창작시 - 최정/대학 시절 시(1992-1996) 2010.12.04
십리길 십리길 최 정 다달이 수십 개의 알약 삼켜야 하는 아버지 슬레이트 지붕 아슬아슬 이고 있는 서까래처럼 말라 지팡이로 찾아가는 경로당 십리 길 보일러로 고친 방에 누워 얼굴 퉁퉁 부은 어머니 위장병으로 깬 새벽마다 안방에 걸린 메주 같은 손으로 쌀 씻으러 가는 부엌 십리 길 하얗게 서리 뒤집어.. # 창작시 - 최정/대학 시절 시(1992-1996) 2010.12.04
토끼풀 토끼풀 최 정 비쩍 마른 검둥이가 외양간 독차지하더니 돼지우리엔 토끼들만 조몰조몰 몰려다닌다 두어 달 병원에서 손톱 허옇게 흙물 벗은 아버지 밥만큼 약을 삼키고 여름내 토끼풀만 뜯는다 어릴 적 동무들과 뛰어놀다 지치면 뜯어오던 토끼풀 아버지, 이제 그냥 편히 쉬세요 아녀, 가을 되믄 토끼.. # 창작시 - 최정/대학 시절 시(1992-1996) 2010.12.04
정화수 정화수 어머니 최 정 우물가 앵두나무 가지로 달 오르면 물 한 사발 장독대에 올리고 합장하는 아낙네 지발 빌어유, 지아비 무사혀두룩 보살펴 주셔유 다 자란 곡식 두고 눈물로 떠난 피난길 남편은 낯선 군인들에게 끌려가고 가뭄처럼 젖 말라 바락바락 악 쓰던 첫아들 보리물만 먹다 백일 못 넘기고 .. # 창작시 - 최정/대학 시절 시(1992-1996) 2010.12.04
느티나무 느티나무 최 정 마을 한 가운데 뿌리박고 넉넉한 줄기 벌려 농사꾼 이야기 푸른 잎으로 간직해온 느티나무 뒷산 무너지고 공장 연기 날리자 나뭇잎 누렇게 앙상해졌다 철든 자식들은 약속이나 한 듯 도시로 나가 빈 들판만 커다란데 된서리 내린 슬레이트 지붕마다 ‘농산물 수입개방’ 대한민국 살 .. # 창작시 - 최정/대학 시절 시(1992-1996) 2010.12.04
개 짖는 소리 개 짖는 소리 최 정 마을 어른들 지나갈 때 경계 없이 졸고 있던 개들 내가 지나갈 때 신경질적으로 짖어댄다 모처럼의 귀향길 개들이 먼저 아는구나 이방인 취급받는 것이 야속하기만 한데 돌담 무너진 주인 없는 마당 삐거덕거리는 낡은 문짝 군데군데 폐가廢家 마주치다보니 개 짖는 소리 차라리 .. # 창작시 - 최정/대학 시절 시(1992-1996) 2010.12.04
휴학을 하며 휴학을 하며 최 정 대학 보내준 굽은 허리 온라인 통장 받아 마르크스와 레닌 사들면 전공책에 쓰여 있지 않던 깨우침들 평생 닳고 닳은 농부의 낫 있다고 철거촌 지키는 비닐천막 있다고 철야 버틴 노동자의 소주 있다고 언제부터인가 찬 서리 같은 땀 끊이질 않아 불안하게 손바닥 닦는 버릇 생겼다 .. # 창작시 - 최정/대학 시절 시(1992-1996) 2010.12.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