땅끝에서 땅끝에서 최 정 그대에게 가는 길은 처음부터 끊어져 있었다 밀물은 차오르며 지친 발목 한 걸음씩 밀어내고 땅끝에 홀로 선 토말비土末碑* 길은 없다, 꿈쩍 않지만 이 끝에서나마 그리움의 덩어리로 솟아오른 섬이 되겠다 바람이라도 불어오면 그대인 줄 알겠다 * 토말비 - 전남 해남군 .. # 창작시 - 최정/용현동 시절 시(1997-99) 2010.12.05
을왕리 을왕리 최 정 새벽 썰물 따라 걸으면 여린 달 아래 거꾸러진 닻들이 발목잡고 놓아주지 않는 을왕리 해수욕장 더 이상 올려지지 않아 켜켜이 녹슬고 있는 닻들의 무덤 그 끝에 서해가 출렁인다 돌 아 서 는 등 뒤, 환하게 불 켜는 고깃배 한 척 닻이 오르고 서해가 오르고 내 녹슨 꿈 덩달.. # 창작시 - 최정/용현동 시절 시(1997-99) 2010.12.05
부여에서 부여에서 최 정 어둠이 강을 밀어간다 금강 줄기 따라가다 고란사皐蘭寺에서 보살님이 주시는 인절미 고마워 향을 피워 올린다 낙화암에 올라서서 내 삼천 궁녀는 아니더라도 저 푸른 강물 속에 욕망의 알갱이들 내던질 수 있을까 했는데, 고란사 마당에 앉아 보니 어둠이 강을 밀어간다.. # 창작시 - 최정/용현동 시절 시(1997-99) 2010.12.05
눈송이, 이놈 눈송이, 이놈 최 정 쏟아진다, 겨울보다 감기가 먼저 오고 설사하듯 눈이 쏟아진다 미처 벗지 못한 허물은 불편하다 방바닥에 달라붙어 몸은 딱딱하게 굳어가고 눈송이들 창에 와 부딪혀 녹아내린다 저 눈송이처럼 살비듬 한 꺼풀씩 벗듯 방바닥만한 그리움 맑게 녹아 비워진다면 다행히.. # 창작시 - 최정/용현동 시절 시(1997-99) 2010.12.05
메뚜기 메뚜기 최 정 들기름에 달달 볶으면 방아깨비처럼 뛰어놀던 어린 시절 먹을거리 되었지 마냥 신났던지 눈꼽 비비며 지게 꽁무니 따라나서면 아버지는 이슬 마르기 전에 많이 잡으라고 한 움큼 씩 벼를 베어 앞에다 밀어 주었지 토실한 이삭 사이 이슬 덮고 잠들어 있던 메뚜기 농약 때문.. # 창작시 - 최정/대학 시절 시(1992-1996) 2010.12.04
故 김남주 시인의 묘소에서 故 김남주 시인의 묘소에서 최 정 찌르르, 찌르르 덜컹이는 차창에 매달려 여치 한 마리 따라 왔나 봅니다 무명열사의 무덤 지나 당신이 누운 곳 찌르르, 찌르르 여치 한 마리가 안내해 주고 있습니다 술 한잔 올릴 때마다 슬픔처럼 메뚜기가 툭툭 튀어 오릅니다 들녘에는 절망의 내용도 없이 낟알의 .. # 창작시 - 최정/대학 시절 시(1992-1996) 2010.12.04
호박 넝쿨 호박 넝쿨 최 정 홈통 친친 감으며 삼층 벽돌집 기어오르는 호박 넝쿨 노오란 꽃 열병처럼 내밀고 장마 속에서 용케 여린 새순이 먼저 길 더듬어 간다 아득한 저 곳에서 어떻게 열매 맺을까 이십대는 언제나 아득했다 사랑도 혁명도 시도 곧 폭염이었다 나는 식욕도 없이 잔뜩 엉킨 넝쿨이 되어 언어에.. # 창작시 - 최정/대학 시절 시(1992-1996) 2010.12.04
천적이 없는 시대 천적이 없는 시대 최 정 새 떼는 더 이상 날지 않는다 구멍 난 플라타너스 이파리들 흉측하게 매달려 있는 송충이의 나라 새 떼의 집은 어디인가 송충이 떼처럼 우글대는 욕망의 거리에서 우리는 제각기 통화 중 졸업을 한 학기 앞두고 나는 이제 대학을 증오한다 # 창작시 - 최정/대학 시절 시(1992-1996) 2010.12.04
엄마의 눈 엄마의 눈 최 정 항상 눈물 그렁그렁 시집살이 얘기 나올라치면 벌써 그렁그렁 일일 연속극 보다가도 그렁그렁 나는 그 눈이 가난해보여 싫었습니다 나약한 당신의 눈물에게 복수하려고 눈물 감추는 버릇 생겼습니다 눈물 말라버린 나는 하루에도 몇 번씩 핏발선 마른 눈 겨누고 있는데 항상 그 자리.. # 창작시 - 최정/대학 시절 시(1992-1996) 2010.12.04
작약도 작약도 최 정 배부른 누이 달이랑 빠진 우물 옆에 해마다 붉은 작약 미친년처럼 피었다 해삼 먹고 싶다며 소금기 젖은 목소리 예쁘던 누이 뱃길 따라 시퍼렇게 뒤척이다 서해 끝 노을 아름다운 곳으로 갔다 애 아비는 얼굴 까만 고깃배 타는 사내일거라 했다 달처럼 떠오른 섬, 작약도 * 작약도에서 열.. # 창작시 - 최정/대학 시절 시(1992-1996) 2010.12.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