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진이 '동짓날 기나긴 밤을' 동짓날 기나긴 밤을 황진이 동짓날 기나긴 밤을 한 허리를 베어내어 춘풍(春風) 이불 아래 서리서리 넣었다가 어론님 오신 날 밤이어든 굽이굽이 펴리라 - <한국고전시가선>(창작과비평사, 1997) 중에서 - 하, 어느 구절 하나 절창이 아닌 구절이 없어서 저절로 카아---, 감탄사가 나옵니다. 가장 춥고.. # 시 읽기/좋은시 읽기 2010.12.02
박경리 '옛날의 그 집' 옛날의 그 집 박경리 빗자루병에 걸린 대추나무 수십 그루가 어느 날 일시에 죽어 자빠진 그 집 십오 년을 살았다 빈 창고같이 휭덩그레한 큰 집에 밤이 오면 소쩍새와 쑥꾹새가 울었고 연못의 맹꽁이는 목이 터져라 소리 지르던 이른 봄 그 집에서 나는 혼자 살았다 다행히 뜰은 넓어서 배추 심고 고추.. # 시 읽기/좋은시 읽기 2010.12.01
고정희 '고백' 고백 고정희 너에게로 가는 그리움의 전깃줄에 나는 감 전 되 었 다 고정희의 <아름다운 사람 하나>(푸른숲, 1996) 중에서 # 시 읽기/좋은시 읽기 2010.12.01
문부식 '눈 내리는 겨울밤에 쓴 마지막 시' 눈 내리는 겨울밤에 쓴 마지막 시 문부식 이 눈 밟고 가게 될 것인가 저기 낮은 담을 돌아 사형장으로 가는 길 위로 눈이 내린다 어둠 속에서 지금 눈을 맞고 선 헐벗은 나무들 그 옆을 지나 사형장이 보이면 대개 반은 죽은 사람이 되고 만다지 철문이 열리고 잠시 머물던 독방을 나와 사형장까지 그 몸.. # 시 읽기/좋은시 읽기 2010.12.01
최성민 '시집詩集을 사다' 시집詩集을 사다 최성민 지하철이 비틀거리며 등을 돌리는 배다리 철길 아래 세월이 주저앉은 책방에서 낯익은 이름 하나 발견하고 절반 값으로 책 한 권 품는다 한쪽 귀 찢어진 책장을 펴면 까아만 글자들이 일제히 일어나 내 가슴 언저리에 박혀 울창한 숲을 이룬다 굵은 가지를 힘차게 뻗으며 하늘.. # 시 읽기/좋은시 읽기 2010.11.30
나희덕 '물소리를 듣다' 물소리를 듣다 나희덕 우리가 싸운 것도 모르고 큰애가 자다 일어나 눈 비비고 화장실 간다 뒤척이던 그가 돌아누운 등을 향해 말한다 당신...... 자?...... 저 소리 좀 들어봐...... 녀석 오줌 누는 소리 좀 들어봐...... 기운차고...... 오래 누고...... 저렇도록 당신이 키웠잖어...... 당신이...... 등과 등 사이.. # 시 읽기/좋은시 읽기 2010.11.30
이세기 '침' 침 이세기 세상을 어둡게 보아서인가 점자를 읽어내리던 손을 잠시 거두고 침구사는 내게 말한다 화가 머리에 응혈되어 있어 풀어야겠습니다 짚었던 맥을 가만히 놓더니 몸을 지켜야지요 침을 놓는 장님의 손은 천수의 눈을 가졌는지 혈맥을 짚더니 혈자리를 찾아 침을 놓는다 기혈이 뚫릴 때까지 침.. # 시 읽기/좋은시 읽기 2010.11.30
이세기 '이작행' 이작행 이세기 이작행 완행 철부선 여객실에 베트남에서 왔다는 새색시가 갓난아이에게 젖을 물리고 있다 섬사람 몇몇이 그 엄숙한 광경을 신기한 듯 보며 어디로 가냐고 물으니 집으로 간다고 한다 집이 어디냐 하니 이작도라고 한다 어디를 다녀가냐고 하니 설 쇠기 위해 시장에 다녀온다며 숙주나.. # 시 읽기/좋은시 읽기 2010.11.30
정희성 <태백산행> 태백산행 정희성 눈이 내린다 기차 타고 태백에 가야겠다 배낭 둘러메고 나서는데 등 뒤에서 아내가 구시렁댄다 지가 열일곱 살이야 열아홉 살이야 구시렁구시렁 눈이 내리는 산등성 숨차게 올라가는데 칠십고개 넘어선 노인네들이 여보 젊은이 함께 가지 앞지르는 나를 불러 세워 올해 몇이냐고 쉰.. # 시 읽기/좋은시 읽기 2010.11.29
김선태 <조금새끼> 조금새끼 김선태 가난한 선원들이 모여사는 목포 온금동에는 조금새끼라는 말이 있지요. 조금 물때에 밴 새끼라는 뜻이지요. 조금은 바닷물이 조금밖에 나지 않아 선원들이 출어를 포기하는 때이지요. 모처럼 집에 들어와 쉬면서 할일이 무엇이겠는지요? 그래서 조금은 집집마다 애를 갖는 물때이기.. # 시 읽기/좋은시 읽기 2010.11.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