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호승 '결빙' 결빙 정호승 결빙의 순간은 뜨겁다 꽝꽝 얼어붙은 겨울 강 도도히 흐르는 강물조차 일생에 한번은 모든 흐름을 멈추고 서로 한몸을 이루는 순간은 뜨겁다 정호승, <밥값>(창비, 2010) 중에서 # 시 읽기/좋은시 읽기 2011.01.06
박노해 '그러니 그대 사라지지 말아라' 그러니 그대 사라지지 말아라 박노해 안데스 산맥의 만년설산 가장 높고 깊은 곳에 사는 께로족 마을을 찾아가는 길에 희박한 공기는 열 걸음만 걸어도 숨이 차고 발길에 떨어지는 돌들이 아찔한 벼랑을 구르며 태초의 정적을 깨뜨리는 칠흑 같은 밤의 고원 어둠이 이토록 무겁고 무서운 것이었던가 .. # 시 읽기/좋은시 읽기 2011.01.02
박노해 '괘종시계' 괘종시계 박노해 안데스 고원의 원주민 부족은 여명이 밝아오면 높은 언덕으로 올라가 동쪽을 향해 절을 하며 기도를 한다 파차마마여, 오늘도 태양을 보내주소서 너무 오래 구름이 끼고 알파까가 병들고 감자 흉작이 드는 것도 신에게 바치는 효성이 모자란 탓이라고 그리하여 날마다 태양이 뜨는 것.. # 시 읽기/좋은시 읽기 2011.01.02
서산대사의 시 눈길을 걸을 때 흐트러지게 걷지 마라 내가 걷는 발자국이 뒤에 오는 이의 길이 될 것이니 踏雪野中去 (답설야중거) 不須胡亂行 (불수호란행) 今日我行跡 (금일아행적) 遂作後人程 (수작후인정) 백범이 통일정부 수립 협의차 북행하기 전에 쓴 서산대사의 시라고 한다. 리영희의 서재에는 오래 전부터 .. # 시 읽기/좋은시 읽기 2010.12.31
안현미 '내 책상 위의 2009' 내 책상 위의 2009 안현미 그림과 음악과 호찌민 평전이 있다 먼지가 두껍게 앉은 스탠드도 있다. 까망도 있다 의무감도 있다 최선을 다해보려 낑낑대는 나도 있다 없는 것들까지 있다 밤도 있다 거울도 있다 아킬레스건도 있다 꿈도 있다 21세기가 있다 100명의 소녀들에게 아침을 나눠주는 당신이 있다.. # 시 읽기/좋은시 읽기 2010.12.21
박영근 '탑' 탑 박영근 저 탑이 왜 이리 간절할까 내리는 어스름에 산도 멀어지고 대낮의 푸른빛도 나무도 사라지고 수백년 시간을 거슬러 무너져가는 몸으로 천지간에 아슬히 살아남아 저 탑이 왜 이리 나를 부를까 사방 어둠속 홀로 서성이는데 이내 탑마저 지워지고 나만 남아 어둠으로 남아 문득 뜨거운 이마.. # 시 읽기/좋은시 읽기 2010.12.20
박영근 '연평도의 말' 연평도의 말 박영근 저 바다가 감추고 있는 뜨거운 물길 하나를 나는 기억하고 있다 부두는 비상등 불빛으로 스스로 제 몸을 묶어 집총자세로 며칠째 말이 없고 어린 칠산바다에서 억센 파도를 배우고 황금색으로 단단해지는 비늘의 바다 서산 태안을 지나 바람 잔잔해지는 한저녁쯤에 내 깊은 곳에.. # 시 읽기/좋은시 읽기 2010.12.20
김진경 '그애의 백제 미륵반가사유' 그애의 백제 미륵반가사유 김진경 이제 여중학교짜리 애가 남자애와 살림을 차렸는지 찾아간 산동네 단칸방 앞에서 불러도 대답은 없고 방문을 여니 희미하게 비쳐드는 햇빛 속 옷궤짝 위에 턱을 괴고 멍하니 앉아 있다 슬퍼하는 겐지 무슨 비밀스러운 걸 알았다는 겐지 빙긋이 웃는 솜털이 보송보송.. # 시 읽기/좋은시 읽기 2010.12.19
허 연 '그날도 아버지는' 그날도 아버지는 허 연 낮술에 취한 아버지는 밥상을 엎고 병을 깨어들었다. 더러운 자식들, 우리가 왜 이래야 되냐고. 어머니는 까무러치듯 쓰러졌고 비가 내렸다. 비명과 함께 달려온 옆집 숙부가 아버지를 가로막았다. 형님 왜 이러세요, 나이 생각을 하셔야지요 나이를. 아버지는 4라운드짜리 권투.. # 시 읽기/좋은시 읽기 2010.12.19
이정록 '서시' 서시 이정록 마을이 가까울수록 나무는 흠집이 많다 내 몸이 너무 성하다 이정록, <벌레의 집은 아늑하다>(문학동네, 1994) 중에서 # 시 읽기/좋은시 읽기 2010.12.19